[원불교신문=정성헌 기자] 소태산은 말했다. 스승의 지도에 복종하여 순서를 밟아 진행하고 보면 마침내 성공의 지경에 이를 것이라고.
어린 나이에 모셨던 육타원 이동진화 선진과 이를 신성으로 보필한 용타원 서대인 선진을 뵈면서 신심과 공심을 철두철미하게 배웠던 충타원 유현정(77·充陀圓 柳玄正) 원로교무. 그의 순박한 신성에서 나온 순일한 공심은 교단 복지계의 기틀을 잡는 성과를 낳았다.

출가는 자연스러운 것

유 원로교무 집안은 할머니 때부터 철저한 원불교 집안이었다. 교동교당에 다니셨던 어머니도 신심이 대단했는데, 일만 생기면 그를 교당에 심부름 보냈다. 어려서부터 교당문화에 익숙해지게 하기 위해서였다. 

"융타원 김영신 교무님이 계실 때였지. 어머니 심부름을 가면 어찌나 이뻐하시던지." 이러한 분위기 속에 원광여자중학교, 원광여자고등학교를 다니며 정타원 이정은 교무의 지도를 받았다. 

"기도정성이 장하시고, 조용하시면서도 지도관리 잘하시는 이정은 교무님을 뵈면서 어린 나에게 인상이 깊었어. 나도 저런 모습의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지."

더욱이 고모였던 유장순 교무와 유성일 교무가 이미 전무출신이었고, 예산 이철행 교무와 수계리 이웃집이었던 터라 그에게 전무출신은 너무나 친숙하고 당연한 것이었다.

'현정아, 나 믿지야'

원기49년, 그가 졸업하기 1년 전이었다. 교무선을 날 때 황정신행 선진이 총부를 찾아 대중 앞에서 연설을 했다.
"한국보육원을 혼자 운영하는데 힘드셨나봐. '삼백여 명을 돌보는데 창고지기하는 사람도 없고, 마음공부 가르치는 사람도 없고. 대종사님 살아계셨으면 나를 이렇게 혼자 두었겠냐'며 하소연하시는 거야."

이후 총부에서는 긴급 간부회의가 열렸다."당시 이완철 교정원장님을 우리들은 응산 할아버지라 불렀지. 응산 할아버지가 나를 부르시더니 '현정아, 나 믿지야?' 하셔. 나는 '예 믿지요'하니까 '나 믿으면 황 선생을 몇 년만 봐드리고 와라'고 하시는 거야." 당시 한국보육원은 얼마나 힘든 곳인지, 발령받은 교무들이 1년만에 나오기가 부지기수였다. 더욱이 갓 졸업해 앳띤 유 원로에게 팔타원은 '너무 어리니까 머리 내리고, 사복 입고 와라'고 했다.

"당시 종로교당에 있던 법타원 김이현 교무님이 '현정아, 나 믿냐?'고 응산 할아버지하고 똑같은 말씀을 하셔. '우리가 대종사님 받들라고 왔으니까, 그 분도 받들어드려야지. 머리는 천번 올렸다 내릴 수 있는 거야'하면서 달래셔."

한국보육원에 막상 일을 시작하고보니 팔타원님은 착하고 유순한 유 교무를 굉장히 예뻐했다. 당시 전쟁고아들이 많았는데 외국에서 고아들을 위해 보내는 물품이 많았다. 유 교무는 그 물품들을 받으면 '고맙게 잘 받았다'고 답장을 쓰는 역할을 맡았다. 영어로 오는 편지들인데 당시 서울 YMCA에 가서 해석해주면 글을 읽고 답장을 써서 다시 영어로 번역해 보내는 일이었다. 그렇게 3년을 보내고 나니 김이현 교무가 그를 총부 교육부로 발령받도록 했다.

신심과 전체공심

총부 교육부에서의 삶은 그에게 큰 각성을 안겨준 곳이었다. 정확히 말해 그가 금강원에서 살면서 모시던 육타원 이동진화 선진과 용타원 서대인 선진을 모시면서다.

"그 당시 금강원이라고 하면 무서운 곳이었지. 엄격하기로 소문난 육타원님과 용타원님이 계신 곳이었거든."
하지만 유 교무의 무난하고 밝은 천성은 어른들의 귀여움을 받고 살았다. 그 속에서 어른들의 심법은 그가 참된 전무출신으로 거듭나는데 큰 밑거름이 된다.

"어른들이 늘 그러셔. '신심, 공심 있어야 주인이다. 출가해 산다고 해도 신심하고 전체 공심 없으면 소용없다.' 그 말씀 들으니까 내 머리에 딱 박혀서 자립이 생기더라."
육타원 선진은 귀한 빵이 생기면 교정원장이었던 응산 할아버지부터 챙겼다. 그리고 궂은 일하는 산업부 직원들, 식당 감원 등 소외받을 만한 곳부터 나누었다. 유 교무는 공심이란 게 저런 것임을 실감했다. 또 육타원 선진을 모셨던 용타원 서대인 선진의 심법에도 크게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용타원님이 육타원님 시봉하는 것을 보면 말단직원이 대통령 모시는 것 같았어. 그래서 내가 '아 스승님을 모시려면 저렇게 모셔야 하는구나'하고 크게 배웠지."
원기56년 서울교당에 발령받았을 때에도, 원기58년 구로교당을 개척할 때에도 그가 7년동안 '신심, 공심'으로만 살 수 있었던 것도 다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소나무는 소나무 역할만

어느 날 전종철 교무가 찾아왔다. 원평교당으로 가라는 것이다. "깜짝 놀랐지. 내년부터 대산종법사께서 봄, 가을로 3개월씩 휴양을 원평으로 오신다는 거야. 누군가 그 많은 사람 밥을 해줘야 하는데 총부에서 나를 신청했다는 거야. 나보고 '법인성사 하것냐?' 그러셔."
그 많은 대중 식구들 밥하는 것보다 전임이었던 박청수 교무처럼 잘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컸다. 박 교무처럼 해야 한다는 생각만 하면 가슴이 벌렁벌렁 거렸다.

"그러다가 '아 그렇지. 소나무는 소나무 역할만 하면 되는 것처럼, 나는 내 역할만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번쩍 드는 거여."
그런 다짐으로 오로지 '대산종법사님 오시면 어떻게 편안하게 모실 것이냐, 대중들에게 따뜻한 밥 충분히 해드리고 편안하게만 해드려야겠다'는 일념이 모아졌다. 아무리 바빠도 대중식사에 소홀함 없이 하나하나 챙기는 유 교무의 마음을 대산종법사가 알았는지, 설법 시간에 참석 못한 그를 불렀다.

"대산종법사님이 나만 보면 웃어주셔. 하루는 '현정이 오라 해라'하시고는 사진 찍자고 하셔. 손을 꽉 잡아주시면서 사진을 찍었지. 가실 때는 '편안히 있다가 간다'고 하셨어."

사회복지 백년대계

이후 남한강사건으로 어려웠던 서울회관에 원기67년 이관도 교무와 발령을 받았다. 완공은 됐지만 난방도 안되고 물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비어있는 공간을 활용해 법당을 만들었고, 초대교무로 법회를 보면서 교도 십수명을 불려 오늘날 남서울교당 시초가 됐다.

원기72년 광주교당 발령을 받고 살다가 원기74년 이철행 교정원장의 부름을 받고 공익부로 오게 된다. 이듬해 소태산 대종사 탄생 100주년 사업 일환으로 은혜심기 운동을 시작해야 할 때였다. 당시 기근이 가장 심한 아프리카 수단(Sudan)에 컨테이너 4개 물품을 싣고 현지를 방문했다. 가뭄과 내전 등 산지옥이 따로없는 그곳의 실상을 보고 많이도 울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이들을 돕기 위해 강의도 열심히 다녔다.

그러다가 이철행 교정원장에게 특명이 내려진다.
"어느 날 부르시더니 '앞으로는 노인의 시대가 도래한다'고 하시면서 '각 교당 교도 요인들이 총부 그늘에 살고자 할 것이다. 니가 있을 때 교단 공도자를 위한 복지시설을 지어야겠다'고 하셔."

아무것도 몰랐지만 당시 자선원 창립주였던 김정문 원장과 상의하면서 추진했다. 이곳이 지금의 상록원이다. 교단 최초 유료 양로원이 들어선 것이다.
"당시는 법호 받기가 어려웠어. 법호 못타면 상록원을 들어올 수 없었지. 그러니 법호 탄 요인들의 공부실력이 어떻겠어. 우리가 긴장을 바짝했지. 아침 수양시간부터 저녁 참회기도 시간까지 완전히 11과목 훈련으로 5년간 그 분들 모시고 열심히 살았지."

상록원은 교도들 말년 수양을 제대로 지내게 한 곳이었다. 터는 안이정 선진이 자리잡아 주었고, 상록원이란 이름은 박장식 선진이 지어주었다. 이것만 있으면 된다

이후 영광교구 교구장으로 발령받았지만, 2년만에 종양이 발견돼 큰 수술을 받고 투병하다가 어느 정도 완쾌되니 다시 상록원 원장으로 부임한 뒤 퇴임했다.
"나는 가는 곳마다 정성뿐이었다. 기도와 정성 아니면 사은님의 도움을 못 받았을 것이여. 내 힘은 그것밖에 없다. 어려서 금강원에 살 때 신심과 전체 공심만 들은 거밖에 없어. 이거 없으면 껍데기라고 하셨거든. 그것만 있으면 공부심은 자연히 생긴다고 하셨지."

머리에 종양이 9개나 발견되었어도 모두 사은님께 허심탄회하게 맡겨버릴 수 있었던 것도 평생 '신심, 공심'으로만 살았던 심법 때문이었으리라.
후진들에게 할 말은 이것밖에 없다고 하면서 말이다.

[2018년 1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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