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바르게 세우고자 밝힌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새 대통령이 취임연설에서 국민들의 심금을 울린 말은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말일 것이다. 문명사회에 축적된 모든 모순을 극복하고픈 인류의 열망을 나타낸다면 이 말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므로 공정한 사회적 시스템을 갖춰 정의로운 세계를 만들어가길 바라는 민중의 뜻이 담겨 있다.

이 희망은 결국 정의가 무엇이냐는 공동체 구성원의 공통된 인식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 속 인류는 기회와 과정에 대한 제도적인 공평함을 세우기 위해 피눈물 어린 투쟁을 해왔으며, 인지의 발달로 그 속도는 더욱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정의로움'에 대한 시각이 달라서 사회 모든 계층이 참여하는 화합의 기쁨을 맛보기 어렵다. 지도자의 덕목으로 참된 정의에 기반한 대화합으로 이끌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정의의 문제에 원불교는 어떠한 해답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재론의 여지없이 일원상의 진리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인도정의가 근본이다. 그 속성은 상생, 일심, 중도의 정의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상생의 정의는 진리의 모습인,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은혜의 세계를 보은으로 이 땅에 실현하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 의미는 보은에 있다. 인간은 은(恩)의 관계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존재로서의 자기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 은은 만유가 생성되는 힘인 동시에 무한생명력이다. 마르크스가 인간불평등의 근원인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 사회적 소유로 전환해야 한다고 한 것은 인간과 인간이 서로 대등하고 독립된 자유로운 관계라는 정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적 정의는 타자가 나의 존재 근거라는 은적 관계를 회복하지 않고는 영원한 과제로 남을 뿐이다.

두 번째 일심의 정의는 인간의 본성이 일원상의 진리와 일치하며, 만유를 창조하는 일심이야말로 문명의 원천적 구조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의 원상, 하나의 태극이다. 따라서 인간의 성품은 진리를 내재하고 있으며, 또한 시공을 초월하여 진리와 하나이다. 일심은 불성이며,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성을 말한다. 따라서 이 일심에서 나온 행이야말로 정의이며, 그렇지 않으면 불의이다. 현대사회의 분배적 정의는 약자를 배려하지 않고, 욕망을 절제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다. 한정된 자원을 두고 다투는 마음을 하나의 세계를 위한 공(公)으로 향하게 하는 일심이야말로 지구를 구하는 정의이다. 

세 번째는 삼학의 구체적 결실인 중도의 정의이다.

삼학의 일치는 중도, 중용, 중정으로 드러난다. 해탈과 정각, 즉 텅 빈 마음과 바른 생각 위에 융통 자재한 시중(時中)의 덕이 나타난다. 이는 곧 파사현정하는 마음이며,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마음이다. 불의의 원인은 집착과 편착이며, 희로애락을 곳과 때에 맞게 쓰는 마음이 중도행이다. 최근 공리주의 혹은 자유지상주의나 평등주의와 같은 정의 논쟁은 인간의 중도수행을 토대로 했을 때 중화의 길이 열린다. 이성분별의 소산인 자유와 평등은 도와 덕이 일치하는 중도의 영성세계를 만나야 비로소 그 한계를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     

/원광대학교   

[2018년 2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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