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잡지의 생존은 오로지 '눈 밝고 맘 따순 독자'


[원불교신문=이여원 기자] '전라도 골골샅샅 땀 흘려 일하는 할매 할배들의 입말을 귀히 받자와 모시는 월간 〈전라도닷컴> 편집장', '전라도 엄니들이 자식들을 위해 애면글면 차려낸 밥상 이야기 <풍년식탐>과 전라도의 근원적인 아름다움을 탐구한 <전라도, 촌스러움의 미학> 등을 펴낸 글쟁이.'

이렇게 소개되는 이가 있다. 정작 자신은 그저 '촌스러운 글쟁이'라고 말하는 이, 황풍년 편집장과 차 한잔을 두고 마주했다.
"오래된 것을 쉽게 버리지 못해요. 새것보다는 낡고 빛바랜 것들에 더 맴(마음)이 가고. 돌아가신 분의 전화번호도 쉽게 못 지우죠." 그에게 '촌스럽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그런 그가 발 딛고 선 자리가 우주라는 신념으로 지역을 기록하고 있다. '오늘 아니면 기록하지 못할 전라도'를 담고 있는 월간 잡지, <전라도닷컴>이다.

손에, 가슴에 기꺼이 '앵기는' 잡지

전라도닷컴은 2000년 웹진(web magazine)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16개월 여 만인 2002년 3월, 종이로 만나는 월간 <전라도닷컴>을 창간했다. 기존의 타블로이드 신문보다 폭이 좀 넓고, 길이는 약간 짧은 판형이다. 독자입장에서 보면 신문도 아니고, 잡지도 아닌, 그야말로 책장에 꽂아두기 애매한 크기였다. 

"가만히 놓여지기보다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싶다.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면서 닳고, 찢기고, 떨어져 밟히더라도." "하루 세 끼를 먹어 없애듯, 한 달에 한 끼가 되고 싶다. 이야기들은 독자의 마음속에 한 점 흔적이 되고, 남겨진 껍데기는 그냥 종이여도 좋겠다. 시골집 아궁이 불쏘시개든, 사무실 밖에 밀쳐진 자장면 빈 그릇 덮개든. 자취생의 라면냄비에 깔리는 받침이든." "그리고 또다시 손에 가슴에 기꺼이 앵기는, 한 달 한 끼의 양식으로 소용되고 싶다." 가슴에 기꺼이 '앵기는' 잡지, 한 달 한 끼의 양식으로 '소용'되는 잡지, 손에 딱 잡히는 잡지 크기를 거듭 고민한 황 편집장의 속내는 그랬다. 

'뭔 말이 요러크름 꼬숩당가'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지역의 삶과 역사를 끊임없이 기록하면서 자존감을 찾는 것, 그 가치의 소중함을 담고 싶었어요. 있는 그대로의 삶, 가장 보편적인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담아내고 싶었죠. 뉴스는 나랑 가장 가까운 것 일수록 중요하지요." 

그래서 <전라도닷컴>은 전라도에 발 딛고 사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 올망졸망 오일장, 굽이굽이 돌담길, 흥으로 정으로 어울리는 우리네 이웃, 골골샅샅 땀 흘려 일하는 할매 할배들이 주인공이다. 전라도가 탯자리요 삶터인 사람만이 느끼는 슬픔과 연민, 분노와 격정, 존경과 감사, 그렇게 복잡 미묘한 감정의 기복까지 고스란히 드러난다. 

<전라도닷컴>이 고수하는 지역말(입말)의 원칙도 이와 맥이 닿는다. "전라도 어르신들이 가장 많이 쓰는 입말을 꼽으라면 '암시랑토', '싸목싸목', '항꾼에'를 들 수 있어요. '암시랑토'는 스스로에게 닥친 어려움을 꿋꿋하게 이겨내는 의지가 담겨있죠. '싸목싸목'은 무슨 일이든 순리대로 풀어내야 한다는 경구이고, '항꾼에'는 더불어 살아가는 행복을 함축하고 있어요." '아무렇지도', '천천히', '함께'로는 도저히 말뜻과 어감을 온전하게 주고받을 수 없다는 황 편집장. 

남도땅 황토밭에서 캐내거나, 질퍽한 갯벌에서 건져 올린, '다숩고 권있는' 전라도 사람의 속내를 그대로 보여주는 입말. 진솔한 삶의 모습, 진진한 인생철학을 오롯이 기록하자면 단어 하나도 훼손하지 않고 받아 적는다. <전라도닷컴>이 펄펄 살아있는 전라도 말을 20여 년째 기록하고 있는 이유다.  

전라도 곳곳, 소박하지만 '손맛'과 '이야기 맛'이 어우러진〈풍년식탐〉.

 

'항꾼에 노놔 묵어야 맛나제'

"오메 어찌까. 별라 맛도 없는디.", "하이고, 이런 짜잔흔(못난) 음식을 뭐던다고 자랑해." 음식 맛에는 '이야기 맛'도 크게 한몫을 한다는 황 편집장. 그는 특별한 음식 맛은 틀림없이 그에 걸맞는 이야기를 품고 있다고 말한다. 남한테 내놓을 만한 음식이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는 '엄니'들의 부끄러움으로 연재하기 쉽지 않았던 기획코너 '풍년식탐.' 황 편집장은 전라도 곳곳을 찾아다니며 소박하지만 '손맛'과 '이야기 맛'이 짠한 감동으로 어우러진 밥상을 소개하고, 연재한 내용을 모아 <풍년식탐>을 엮어냈다. 

"너무 자잘해서 버리기 십상이던 다슬기 짜시래기(쓸 만한 걸 골라낸 나머지)들은 회무침으로 만들어 먹었어요. 다슬기를 삶아 꺼낸 뒤 확독에 넣고 껍질째 마구 갈고 여러 번 체로 쳐서 알갱이만 알뜰살뜰 걸러내 회무침을 하기까지 쏟은 정성이 오죽했겠어요." 

오로지 자식들의 입속에 하나라도 더 넣어줄 요량으로, 갓난아이 새끼손톱만 한 알갱이를 기어이 모았던, 그렇게 가난이 빚어낸 눈물겨운 사랑의 먹을거리들은 자식들의 영혼을 튼실히 살찌우고 오래오래 지울 수 없는 고향의 맛과 기억으로 남아있을 터. <풍년식탐>에는 우리네 어머니들이 무심한 듯 차려내는 밥상에서 '영혼의 헛헛함까지 달래주는 질박하고 정직한 맛의 진수'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황 편집장이 펴낸 또 하나의 책 <전라도, 촌스러움의 미학>(2016년, 행성B잎새)은 2018년 전남도립도서관의 권장도서로 확정됐다. 전남도립도서관에 따르면 광주전남연구원(남도학연구센터)의 추천과 도서관 직원들의 열띤 토론을 거쳐 '전라도 정도 천년' 분야의 유일한 권장도서로 선정된 것이다. 

전라도를 넘어서는 보편타당한 이야기

한국지역출판문화잡지연대(한지연)는 전국의 지역출판인들과 출판학 연구자들, 몇몇 문화단체 활동가들의 모임이다. 황 편집장이 대표를 맡고 있다. 

지난해 '온나라 지역책들의 한마당, 2017 제주한국지역도서전'에서는 팔도의 책들을 한 곳에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양한 주제로 책과 독자의 만남을 주선했다. '책을 만드는 일'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책 만드는 고달픔을 서로 달래며, 모든 인간의 존엄함과 문화의 다양성을 입증하는 사뭇 '큰일'을 진행했다. 

돈과 권력의 기록이 아니기에 <전라도닷컴>의 살림살이는 늘 팍팍하다. 잡지에 실렸다고 다량으로 구매해줄 할매 할배도 없다. 광고를 약속하고 기관이나 단체, 기업을 홍보한 적도 없다. 2002년부터 월간지를 펴내고 도서출판 사업을 해온 <전라도닷컴>의 생존은 오로지 '눈 밝고 맘 따순 독자'들에게 있다. 

강직하고 따듯한 느낌을 받았다며 원불교와의 인연을 기억하는 사람꽃, 그가 흔들리지 않도록. '오래토록 짱짱허니 버틸 놈으로 키워달라'는 독자들의 애달픈 바람이 '존절히' 지켜지기를. 그렇게 '눈 밝고 맘 따순 독자'들이 많아지기를.

2018년 전남도립도서관의 권장도서로 확정된〈전라도, 촌스러움의 미학〉.

 [2018년 2월 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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