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 서서 물소리를 듣는다. 
돌은 진공이다.
돌은 공적이다. 
돌은 완벽한 '무(無)'다.
진리는 '없음'의 뜻보다 크다.
'없음'으로만 끝난다면 진리가 아니다. 
진공이며 공적이며 완벽한 '무(無)'의 돌이
물소리를 듣는다. 
물소리를 듣는 것은 무엇인가 '있다'는 말이다.
묘하게 있는 것이다.
신령스러운 앎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도 진공이고 공적이고 완벽한 '무(無)'다.
진공이고 공적이고 완벽한 '무(無)'인 사람이
물소리를 듣는다.
얼마나 신기하고 묘한 일인가.
얼마나 신령스러운 앎이란 말인가.

귀를 잘라서 계곡에 놓아도 
물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저 '무(無)'일 뿐이기 때문이다. 
묘유가 없다. 원상이 있어야 묘유가 생긴다. 

돌이 물소리를 들을리 없다.
돌은 그저 '무(無)'일 뿐이기 때문이다.
돌은 소태산 대종사님이다. 
소태산 대종사님이 물소리를 들으니
완벽한 진공묘유, 공적영지, 
무무역무무, 비비역비비가 완성되었다.

그러면 돌은 진공만 있고 묘유가 없나?
돌의 속성을 비유했을 뿐이다. 
돌 그 자체로 나타난 것이 묘유이며 영지다. 

/ 삼동청소년회 법인사무처

 [2018년 2월 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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