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진수 교무] 선반에 올려놓은 차 한통이 귀하디귀한 시절이 있었다. 요즘처럼 쉽게 접하는 차와는 다른 차였음이 분명하거니와 겨울 추위가 깊을수록 유독 차 향기가 그리운 것은 자명한 일이다.

차 한 통에 담긴 것은 차 향기만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실천해준 고려시대 문인들은 다시(茶詩, 차를 소재로 읊은 시)에 마음을 옮겼고, 선승들은 사찰에서 생산되는 차나 자신이 선물로 받은 차를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보내 교유했다.

이규보의 시에 등장하는 '유차'는 잔설이 남아있는 이른 봄, 황금빛을 띠는 찻잎으로 만들어진 귀한 차였기에 임금에게 올린 진상품이었다. 귀한 것을 귀하게 대접하고자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차가 불가의 승려들에게 큰 인기를 얻게 된 것은 아마도 그 보건 기능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수행할 때 차를 마시면 정신이 맑아지고 수마(睡魔)를 퇴치하는 데에도 도움이 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찰에서 차의 보건 기능에 주목하게 되면서 일어난 변화 가운데 하나는 승려들의 직접적인 차 재배였다. 특히 중국의 선종은 인도의 교단과 달리 신도들의 보시에 의존하지 않고 자급자족의 경제 공동체를 일궜는데, 이러한 농선(農禪)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것이 바로 차였다. 

이처럼 차가 승려들에 의해 직접 재배되고 만들어지게 되면서 차의 생산은 획기적으로 늘어나고, 차의 종류와 제다 기술 또한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통상적으로 차는 당나라 때에 이르러 크게 성행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선종의 발전과 괘를 같이 하는 것이다. 

이후로 '명산(名山)이 있으면 명찰(名刹)이 있고, 명찰이 있으면 명차(名茶)가 있다'는 말이 공공연히 회자되게 됐다. 송나라 때에 이르러 공차(貢茶)의 반열에 오른 대부분의 차들이 선종의 사찰 주변에서 생산됐다는 사실은 차와 불교의 긴밀한 관계를 가장 직접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중국의 선종 사찰에서는 당나라 시기 이후 각종 청규들이 제정됐는데, 이로써 차는 선종 사찰의 일상생활 속에 보다 깊이 스며들게 된다. 뿐만 아니라 선승들은 차를 정신 경계의 최상승인 선의 경지에 깊숙이 들여놓았다. 이것이 바로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관념이다. 

'다선일미'는 차와 선의 연관성을 말해준다.

선종에 근원을 두고 있는 일본의 차 문화가 명확히 선다(禪茶)의 모습으로 가닥을 잡은 것은 대략 15세기 이후의 일이다. 15세기 말 제8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가 교토의 동산에 은각사를 세움으로써 동산 문화가 일어났는데, 이 무렵에는 관상(觀想)의 풍조가 은근히 번져 차 마시는 데에서도 정신적 사유를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일본의 선적차 문화를 대변하는 유물 가운데 하나가 교토의 대덕사에 소장된 '다선일미' 묵서(墨書)인데, 전설에 의하면 이는 중국 남송의 선종 가운데 일파인 양기파(楊岐派) 대사 원오극근(圓悟克勤)이 쓴 글씨다. 그의 문하에 있다가 일본으로 귀국하는 한 유학승에게 써준 글인데, 그 유학승이 일본에 도착했을 때쯤 배가 전복되고 말았다.

이 글은 이리저리 전하다가 선승 잇큐 소쥰의 손에 들어갔다고 한다. 잇큐는 이 글귀를 보고 다도의 대의를 얻게 됐고, 그의 제자 무라타 쥬코는 와비차를 창안하여 선다(禪茶)의 경계를 확립했으며, 이후 와비차는 다케노 죠오, 센리큐 등의 다도 정신으로 이어지게 됐다.

오늘날 차의 선적 성격을 추구하는 일은 전통의 계승이자 차의 가장 중요한 덕목에 대한 천착이라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원광디지털대학교 차문화경영학과 교수

[2018년 2월 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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