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정도성 도무] <간디 자서전>을 보면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의 아시아국 관리들이 인도인과 중국인들을 보호하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차별과 학대를 하고 있음을 개선하기 위해 간디는 투쟁하면서 정부를 움직여 악질 관리 두 사람을 면직시킨다. 그렇게 해서 아시아국은 깨끗해졌고, 인도인 거주민은 어느 정도 안심하며 살게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간디는 말한다. "그 관리들은 그렇게 나빴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그들을 조금도 미워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이런 말을 했다. "어떤 사람과 그가 하는 행위는 서로 별개의 것이다. 선한 행실은 칭찬을 받아야 하고, 악한 행실은 비난을 받아야 하지만, 그 같은 행실을 한 사람은 선하건 악하건 언제나 그 경위대로 존경을 받든지,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교훈은 말은 쉬우나 실행은 참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증오의 독이 세상에 판을 친다."(<간디 자서전>-나의 진리 실험 이야기) 

성자는 서로 통하는 걸까. 소태산 대종사도 악한 사람은 악으로 세상일을 하는데 자신이 죄를 지으면서 세상일을 하는 것이니까 미워하지 말고 불쌍히 여겨야 한다고 말씀했고(<대종경>요훈품 34장), 이에 호응하듯 정산종사도 '악한 사람은 불쌍히 여길지언정 미워하지 말며, 선한 사람은 추앙할지언정 시기하지 말라'고 말씀했다. (<정산종사법어>법훈편 53장) 

악한 사람을 어떤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지를 일관되게 보여주는 법문들이다. 성자들의 자비 심법은 흔들림이 없다. 

게다가 문인들이 소설을 쓸 때도 흥미를 돋우기 위해 소인이나 악인의 행동을 지나치게 묘사하는 것이 좋지 못한 인연의 씨가 된다(<대종경>인도품 56장)고 꼬집었는데, 이는 문학적 허구에서조차 악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경계하심이요, 간디의 말처럼 '증오의 독'이 세상에 판을 칠까 저어함이다. 

더구나 <정전> 수행편 15장 '병든 사회와 그 치료법'에 보면, '착한 사람은 찬성하고 악한 사람은 불쌍히 여기며, 이로운 것은 저 사람에게 주고, 해로운 것은 내가 가지며, 편안한 것은 저 사람에게 주고 괴로운 것은 내가 가지는 등의 공익심이 없는 연고이니'라고 하여, 악한 사람을 불쌍히 여김이 '공익'의 차원에서 제시되어 있다.

단순히 개인적 차원의 실천에 머무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어 원불교 평화운동과 사회개벽운동이 가야할 길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준 것도 없이 괜히 미운 사람도 있는데, 악한 사람을 미워하지 않기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치열한 자기 수행이 없고서는 실행하기 어렵고, 원불교가 사람 잡는다 할 만하다. 악인에게 적개심을 가지는 건 어쩌면 저항과 혁신을 추동하는 힘이 될 텐데, 그를 불쌍하게 여기라는 말씀은 너무 유약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유약함이 종교적 자비 아닌가. 미워하기는 쉬우나 불쌍히 여기기는 쉽지 않기에 말이다. 

간디는 또 이렇게 말했다. "제도에 저항하고 바로잡으려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제도를 만든 사람을 미워하고 공격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공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원경고등학교

[2018년 2월 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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