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출현 이후, 4차산업혁명과 인공지능
영성시대에 맞는 교화방편으로 대전환해야

I. 인공지능 출현의 역사적 의의
4차 산업혁명의 거대한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산업의 지대한 변화가 예상되기 때문에 산업혁명이라 하지만,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인공지능이 불러올 문명 전반의 대 변혁을 고려하면 산업혁명이란 명칭으로는 오히려 부족한 측면이 있다. 왜냐면 인공지능은 지금까지 있어온 3차례의 산업혁명과는 차원이 다른 대 혁명 즉 개벽을 불러 올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의 나이는 45억 년쯤 된다. 이후의 중요한 역사적 대변혁의 계기를 요약하면 아래 와 같다 하겠다. 45억 년 전: 지구의 생성/ 38억 년 전: 생명의 출현/ 7만 년 전:  현생인류 (homo sapiens)의 출현/ 현재: 인공지능의 출현과 우주 개척 시대

지구의 역사에서 획기적 대 변화는 생물의 출현이었다. 무생물의 세계에 생태계라는 새로운 세계가 열렸기 때문이다. 화성이나 금성, 목성, 토성 등 다른 행성에는 생명체가 없거나 극히 미미하게 있는 말하자면 흙덩어리에 불과하다. 유일하게 지구만이 적절한 온도와 물과 자기장 등 생물에 적합한 환경을 갖추어 바다에서부터 생명체가 출현할 수 있었다.  

생물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약 38억 년 전쯤이다. 생명은 38억년 동안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산소의 발생으로 대기가 오염되어 대부분의 생명체가 절멸되는 가운데 일부가 진화하여 살아남기도 하였고, 천체에서 날아온 운석 등으로 지구가 갑자가 얼어붙는 기후 재앙으로 공룡이 멸종되고 포유류가 새로 나타나는 등 진화는 그야말로 진멸이나 발전이냐의 아슬아슬한 위기를 극복하면서 대 서사시를 써 내려 왔다. 

이 긴 진화의 정점은 인간의 출현이었다. 호모사피엔스는 기존의 생명체들과는 차원이 다른 능력 즉 사고하고 소통하는 지능을 갖춘 생명체이다. 겨우 7만 년 전에 나타난 인간의 출현 후 지구생태계는 되돌릴 수 없는 질적 변화를 겪게 되었다. 자연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그 이전 생태계의 주요 특성이었다면, 인간은 도시와 도로 항만과 같은 인공환경 즉 문명이란 것을 지구에 건설했다. 이로 인해 환경오염과 기후 변화 등 인류의 존재 자체를 위협할 만큼 지구에 큰 변화가 진행 중이며, 화성 등 주변 위성을 개척하여 인류의 생존 영역을 늘리려는 제안까지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인공지능의 출현은 생명진화의 긴 역사에서 인간의 출현만큼이나 극적인 변화를 불러 올 것이다. 태양광으로 전기를 생산하여 스스로 에너지를 얻는 기계동물과 식물로부터 먹이를 얻는 자연동물이 섞여 사는 상황이 올 뿐만 아니라 기계동물들이 주도권을 잡는 그런 세계가 전개될 수도 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에너지를 생산 하는 인공지능들이 인간과 함께 달과 화성에서 어울려 사는 우주 생태계가 형성될 수도 있다. 이 우주 생태계는 지구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일 것이다.

II. 인공지능 시대
인공지능과 인간의 차이는 무엇일까? 지능적인 측면에서는 어쩌면 인공지능이 여러모로 더 우세해질 가능성이 있다. 만약 언어로 하는 사고 활동이나 수학적 계산 등이 인간의 핵심능력이라면 곧 인공지능에 뒤쳐질 것이고 따라서, 인류는 생태계 최고의 위치에서 밀려나게 될 것이다. 이 점은 알파고의 출현으로 이미 입증된 셈이다. 단순한 수학적 계산에서야 당연히 컴퓨터가 잘 하지만 복잡한 문제는 인간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되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만천하에 증명한 사건이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대결 이었다. 

이 바둑대결이 있기 얼마 전까지는 바둑에는 워낙 수가 많아서 포석 단계에서 다음 수를 계산하는 것은 컴퓨터로도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인간은 기계와 달리 직관적 사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컴퓨터와는 질적으로 다르고 따라서 바둑은 인간이 우세할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러한 예상을 완전히 뒤엎었기 때문에 세기적 대결이 된 것이다. 컴퓨터도 외우고 이해하고 학습하고 분석하며 판단하는 등 모든 종류의 지적 능력을 가질 수 있음이 입증된 것이다. 이제는 인공지능은 거의 모든 지적 작업을 인간보다 더 잘 수행할 것이라고 예상하게 되었다. 회계업무, 진단 및 치료 등 의료업무, 기사 작성 등 기자의 업무, 변론 상담 등 법조 업무 등  많은 분야에서 점차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할 것이라고 예상되고 있다.

1960년대에 컴퓨터 발전 초기에 주판 선수와 컴퓨터 간 계산 경쟁이 신문기사에 실리고 화제가 되곤 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 컴퓨터의 계산 능력이 아주 초보적 수준이었지만 불과 몇 년 사이에 은행에서 주판 잘 놓는 상고출신을 뽑지 않게 되었다. 비슷한 상황이 각 분야에서 일어날 것이다. 인공지능은 이 컴퓨터 계산과는 비교가 안 되게 광범위한 영역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추월하는 역사적 시점을 특이점(singularity)이라고 하고 그 시기를 2040년 쯤 이라고 예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오늘날도 생화인지 조화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로 잘 만들어진 조화를 볼 수 있지만, 앞으로는 어린이가 놀고 있는 강아지가 자연 생인지 인공지능 강아지인지 구분이 안될 수도 있고, 날아다니는 벌레가 자연의 벌레인지 인공의 드론인지 모를 수도 있다. 백화점의 판매원이 인공인간인지 정말 사람인지 알기 어려울 수도 있다. 내가 상대하고 있는 것이 자연생명체인지 인공생명인지 알 수 없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인공지능으로 현재 있는 많은 노동직이 없어질 것이 예상되고 있다. 예전에 그 많던 주판원이 은행에서 완전히 사라졌고, 버스의 조수가 사라졌듯이 불원간 택시기사, 택배 기사 등 단순 노동직이 사라질 것이다. 복잡한 노동직도 점차 없어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적 노동에 해당되는 직군도 대부분 큰 변화를 받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이 업무의 대부분을 처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할 것인가?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생명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궁극적 질문에 답해야한다. 이 문제가 더 이상 수도자나 철학자들의 지적 추구에 그칠 수 없는 일상의 문제로 대두된 때문이다. 진짜 사람만을 사랑하고 어울려야 하나, 아니면 내 말을 더 잘 알아듣고 더 잘 놀아주는 기계인간을 사랑해도 되는 것인가? 이런 윤리 도덕적 문제가 현실생활의 문제로 되었기 때문에 인공지능과 인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라는 문제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III. 영성 시대의 도래
인간은 생명체란 점에서 동물에 속한다. 이런 신체적 특성에 더하여 다른 생명체와 가장 크게 다른 점이 언어와 사고능력이 탁월하다는 점이다. 인류문명의 발달사는 바로 지적 능력의 진화와 축적의 역사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지난 사오백년동안 서구를 중심으로 전개된 과학과 기술의 발달에서 비롯한 지식 교육의 대중화는 인간의 가장 중요하고 최고의 가치는 지적능력의 우수성에 있다는 관념이 편만하게 되었다. 지적 우수성이 곧 그 사람의 가치와 능력을 평가하는 잣대의 역할을 하였다. 인간이 가진 다른 능력 예를 들면 직관력이라든가 영적 능력 등은 객관성이 없는 따라서 신뢰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미신적 요소처럼 취급되기 일수였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에는 이런 지적능력보다 더 상위인 영성이 있다. 사람들의 영적 능력의 계발에 큰 장애물이 바로 지적 능력에 대한 지나친 강조였다. 근대 사회에서 지식과 과학의 편중이 심했기 때문에 인간은 사고하는 동물 즉 지능을 가진 생물로 보는 관점이 지배적이었다. 교육 또한 지식 중심이어서 지능이 곧 인간 최고의 본성인 것처럼 보여 왔다. 그런데 인공지능의 강력한 지적기능을 보면 인간의 본성이 지능에 있지 않음을 쉽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인간의 본성을 찾아야할 필요성이 절실해질 것이며, 따라서 영성을 계발하는 일에 모두가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영적 특성을 계발하여 인간의 본성을 밝히는 것이 종교의 중요 역할이다. 

이 전의 3차까지 산업혁명들을 통해서 힘쓰는 노동을 기계가 대신하게 되었다면 4차 혁명은 지적 작업까지 인공지능이 대신하게 되어 이른 바 물질개벽이 최고도로 발달한 시대를 맞게 되었다. 더 이상 지적인 작업을 높이 쳐주는  사회가 아니게 되었다. 그러면 사람이 가장 중요하게 높이 치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찾는 일 즉 영성을 계발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제 정신개벽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정신개벽은 지능에 바탕한 것이 아니고, 영성에 기반한 것이다. 요즘 좌선 명상 등이 서구에서 환영받고 널리 퍼져가고 있지만 동양에서도 전통문화가 아니라 중심 문화로 다시 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미래는 불교나 원불교에 매우 좋은 기회로 다가 오고 있다. 그러므로 교화나 교도 훈련을 인공지능의 시대 상황에 맞추어 개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IV. 교화방편
널리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서는 상황에 따라 알맞은 방편이 필요하다. 불교의 ‘법화경’ ‘비유품’에 이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어떤 나라의 한 마을에 큰 장자가 있었는데 매우 큰 저택에 자녀들이 여럿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이 집에 불이 나서 자신은 나왔는데 자녀들은 불이 붙은 집에서 두려워하지도 않고 장난만 즐기면서 나올 생각을 않고 있었다. 아버지가 아무리 말해도 나오려는 생각조차 없이 그저 즐거운 놀이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이에 아버지는 방편을 지어 “너희들이 좋아하는 여러 가지 장난감과 수레들이 대문밖에 있으니 빨리 나오는 대로 주겠다.”고 하여 아이들을 구출하였다. 이는 삼계화택에서 불타는 고통도 모른 채 삶을 즐기고 있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부처님의 방편을 설명하는 예이다. 이 비유처럼 교화는 그 시대 상황에 맞는 적절한 유인책을 제시하여 중생을 교화의 장으로 먼저 나오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종사님께서 대각하신 후 ‘증산선생’의 ‘치성’을 하여 주위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한 것도 이러한 방편에 속한다 하겠다. 과거 시대에도 실제로 이렇게 하여 성공적인 교화를 이룬 예들이 많다. 한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

1. 물질부족 시대 교화방편: 육이오 전쟁 직후 우리나라는 지극히 가난하여 먹고 살기조차 힘들었다. 이때에 교회에 가면 과자도 주고 하여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교회에 가서 사탕도 얻어먹고 재미있는 얘기도 듣고 하여 자연스럽게 성경도 배우고 신자로 성장하였다. 오늘날도 가난한 나라나  생활이 힘든 곳에서는 쵸코파이 등을 주면서 신도를 확보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같이 물질적으로 풍요해진 지역에서는 효율적인 방편이 될 수 없다.

2. 지식부족 시대 교화방편: 원불교의 초기 교화의 성공적 모형 중 하나가 야학이었다. 산업화 이전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배움의 열기는 컸으나 학교에 갈 수도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이 많았다. 이 때 교당에서 제공하는 공부의 기회가 청소년들을 교화하는 좋은 방편이 되었다. 교무님들 중에도 원불교 가면 공부할 수 있다고 하여 왔다가 발심을 하게 된 분들이 적지 않다. 옛날부터 스님들이나 천주교 사제는 지적인 측면에서 상류지식인이었고, 일반 신도들은 불경이나 성경도 못 읽어본 무식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교무님들도 예전에는 지적인 면에서 지역의 리더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등 교육을 받아서 교도보다 지적인 면에서 신부님이나 스님, 또는 교무님이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지식을 제공하는 센터로서의 기능은 더 이상 교화의 방편이 될 수 가 없게 되었다.

3. 정보과잉 시대 교화 방편: 오늘날은 스마트폰과 유튜브 등 SNS로 지식을 배울 기회가 넘치고 정보가 홍수처럼 흐르는 지식과잉 시대로 인류가 지금 막 경험을 시작하는 변화의 시기이다. 과거처럼 먹을 것이 모자라고 지식이 부족하여 문제인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이 먹어 다이어트가 주 관심이고 정보가 넘쳐 어떻게 선별하고 관리하느냐가 더 큰 과제인 시대이다.

누구에게 무엇을? 이제 교화의 방편을 세우려면 먼저 교화의 대상이 누구이며 이들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파악해야하고 여기에 맞추어 교화를 기획을 해야 한다. 굶주리던 시대에는 보약이 좋은 약이었지만 요즘은 디톡시라고 장을 비우는 방법이 더 요구되는 시대이다. 마찬가지로 정보도 과잉이고 지식도 넘치는 요즘 세태에는 지식과 정보의 디톡시가 필요하다. 생각을 멈추고 마음을 비우는 일이 널리 요구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명상이고 좌선이며 영성을 키우는 일이다. 그래서 서구에서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명상에 대한 요구가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서구에서 불교가 전파되는 길은 사람들이 주로 명상을 하는 방법을 통해서 이지 신앙적 측면에서 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설법을 들으려고 서양 사람들이 절에 가는 경향은 매우 적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교당에 사람 모아놓고 설법을 하는 교화의 패러다임을 재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정시에 지정된 건물에서 강좌를 실시하는 것이 교육의 모델이었듯이, 교화도 역시 유사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것은 과거의 지식부족 시대에 확립된 교육과 교화 방식이다. 그러나 지금 교육은 디지털 교육 형태로 급격히 이동되고 있다. 특히 교양교육은 명강사에 의한 무크 강의가 점차 비중이 높아질 것이며, 사이버를 통한 상시교육 형태로 바뀌고 있다. 마찬가지로 교화도 교당 밖의 사이버 강의가 비중이 점점 높아질 것이다. 다시 말해 정시 교당 설법이 아니라 상시 사이버 설법이 유튜브 등을 통해서 전 세계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여기서 다시 인공지능의 역할이 나오는데, 인공지능에 의한 통역과 번역이 곧 완벽하게 될 것이므로 세계적인 유명 법사의 설법을 스마트폰으로 언제나 어디서나 어느 나라 사람이나 들을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국내에서도 ‘법륜’스님의 설법이나 ‘혜민’스님의 명 강연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3대 영성 지도자인 ‘달라이라마’, ‘틱 나한’ 스님, ‘에카르트 톨레’ 등의 가르침을 바로 보고 들을 수 있다. 젊은 세대일수록 스마트 폰을 통한 정보접속이 높은 만큼 젊은 세대에게 가까이 가려면 어쨌든 스마트폰을 활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정시에서 교당에서 설법을 하는 교화방식은 인공지능과 지식과잉 시대에 맞지 않는다. 첫째로 사람들이 설법과 같은 지식 전달 방식에 대해서는 구태여 법당에 가서 강의를 들을 필요를 깊이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청중의 수준이 그만큼 높아지기 때문에 정말 잘 하기 전에는 어지간한 설법에는 감명 받지도 않는다. 둘째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지식으로 전해지는 법이 아니라 생각의 멈춤과 비움의 훈련 즉 명상이나 좌선, 영성 수련 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당은 이런 사람들이 명상이나 좌선 등을 언제나 편할 때 할 수 있도록 상시 명상 센터 역할을 해야 한다. 절은 이점에서 전통적으로 어느 정도 이 역할을 해왔고, 성당도 사람들이 아무 때나 가서 기도하고 묵상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 교당도 사람들이 언제나 와서 좌선 염불 등을 할 수 있도록 열려있어야 한다. 그리고 교도들이 자율적으로 좌선 팀, 염불 팀, 독경 팀, 기도 팀 등 다양한 형태의 영성 관련 수행 팀을 구성하여 교당을 중심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이들의 활동이 SNS 또는 인터넷 방식으로 널리 유포되는 것을 장려해야한다.    

끝으로 교당 보다는 교단 전체의 차원에서 이 물질개벽의 시대에 맞추어 교화 패러다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 인공지능과 관련된 어휘가 빅데이터이다. 젊은 세대는 스마트폰을 제2의 머리처럼 신체의 일부로 융합된 삶을 살고 있다. 현재 기업의 경영의 패러다임이 생산자 중심에서 소비자 중심으로 전환되고 있는데, 이때 핵심적 역할이 소비자관련 빅데이터 분석이다. 이를 통해 기업은 소비자의 행동 패턴을 분석한 후 사업 기획에 활용한다. 이 빅데이터의 원천은 소비자들이 스마트폰에 남긴 플랫폼 접속, 로그인, 콘텐츠 시청 등의 기록이다. 이 방대한 빅데이터를 분석하는 방법이 인공지능이다. 기업들은 이 분석 자료를 바탕으로 고객의 특성에 맞는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빅데이터의 확보와 분석력이 기업의 경쟁력이 되었다.

이러한 기업의 패러다임 변화는 인공지능 시대 교화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명상을 원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어디에 분포되어 있는지 빅데이터 분석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하고, 이들에 맞는 맞춤 교화를 어떻게 할 것인지 기획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물질개벽의 꽃인 인공지능을 십분 활용하여 정신개벽을 이끌어 가자는 것이다. 이것은 원불교 원래 정신인 생활불교 현대 불교의 정신에 합치하는 적극적 교화요, 널리 중생을 구제하려는 보살의 방편이다.   

(이 칼럼은 경기인천교구 안양지구 단장중앙훈련에서 소광섭 명예교수가 강의한 내용입니다.) 

소광섭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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