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은 교무

소태산 대종사는 김남천, 송적벽 두 제자가 싸우고 이튿날 떠날 일을 미리 예고한다. 그들은 그럴 일이 없다고 부인하지만, 실제로 그 날 싸움이 일어나게 되고 송적벽은 이튿날 짐을 싸서 떠나고 만다. 

이 장을 처음 접했을 때에는 "대종사가 두 제자의 다툼을 예고하는 신통을 보이셨구나"하는 정도로 이해했다. 그러나 이 내용을 곱씹어 볼수록 아끼는 제자들이 떠나게 될 것을 알게 된 대종사의 심경과 이에 대처한 취사에 담긴 뜻을 헤아려보게 된다. 

김남천과 송적벽은 법인성사 후 변산 월명암에 잠시 머물던 대종사를 찾아가 모시기를 간청해 제자가 된 이들이다. 두 사람의 발의로 석두암 건축을 착공하게 되고, 토역일에 능했던 송적벽과 목수였던 김남천은 석두암의 완공에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이들은 이후 원기8년에 완공한 영산원 건축에도 한몫을 담당했다.(〈대종경 사람들〉 참고)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하는 이들 제자를 바라보는 대종사의 심경이 얼마나 흐뭇하고 든든했겠는가.

생각해보면 어찌 대종사 같은 어른이 제자 한 명쯤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송적벽은 본래 증산교 신자로서 대종사의 신통력을 전해 듣고 발심하여 귀의 했으나, 이후 대종사가 불법을 주로 설하자 이에 실망했다고 한다. 제자가 떠나는 것이 속이 상하여 저녁식사를 거를 정도라면, 신통을 좋아하는 송적벽의 특성을 이용해 신통을 한번 보여주거나, 호통을 쳐서라도 그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는 없었을까?

우리는 이 장에서 보여진 대종사의 취사를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다.

앞서 실시품 2장에서도 말씀했듯, 상대방이 내 말을 듣게 하는 방법은 언제까지나 그의 마음이 자연히 돌아서도록 하는 것뿐이며, 어떤 위력으로 사람의 마음을 억지로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설사 신통을 보여 다시 발심하게 한들, 송적벽이 구하는 것이 정법회상의 나갈 방향과 같지 않다면, 언젠가 다시 마음이 식을 것이다.

따라서 두 사람이 싸울 것을 본인들에게 예고하고 "내 밥을 미리 먹지 아니하노라"하며 당신의 속상한 속내를 비친 것은 아마도 대종사가 선택한 최선의 지도법이었으리라. 

그 정도로 말귀를 알아듣고, 마음을 돌려 남기를 바란 스승의 간곡한 뜻을 헤아리지 못한 송적벽을 누가 탓할 것인가. 반면 떠나려는 순간 정신을 차린 김남천은 마음을 돌려 평생 대종사를 모시고, 후일 대종사가 설법할 때 성성한 백발을 날리며 춤을 춰 법흥을 돋운 인물로 묘사 되니 이 둘의 일생, 혹은 영생이 여기서 갈림을 알 수 있다. 

살면서 수없이 상대방의 마음을 내 마음대로 돌리려는 오류를 범한다. 싸우거나, 설득하거나, 혹은 은근히 협박 아닌 협박도 불사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상대방의 마음이 스스로 돌아서도록 불공하는 일일 뿐, 마음을 돌리고 안 돌리고는 전적으로 상대방의 몫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그 결과 역시 온전히 상대가 감수할 몫이며 우리가 대신 어찌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살면서 상대방의 마음을 내 뜻대로 돌리고 싶을 때, 실시품 3장을 떠올리자. 마음이 떠나간 제자는 대종사도 어찌하지 못하였음을….

/미주총부법인

[2018년 3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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