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일연 교도

점심시간에 가끔 이용하는 식당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기존에 없던 '햄 없는 김치볶음밥'이 그것이다.  

참고로 필자는 현재 동물자유연대라는 동물보호단체에서 활동 중이며, 우리 단체 활동가들은 각자 페스코(Pesco) 이상의 채식을 실천 중이다.

활동가들이 이용하는 식당에서 항상 고기종류를 빼달라고 하자 아예 햄이나 고기종류가 들어가지 않은 메뉴를 내놓은 것이다. 나름의 '미트프리(meat free)' 선언이다. 활동가들이 새로운 메뉴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거나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의 선택이 바뀌자 자연스럽게 일어난 변화였다.

모피코트 한 벌을 위해 20마리의 라쿤이 목숨을 잃어야 하고, 무심코 고른 달걀 하나를 위해 닭들은 평생 A4 한 장 크기도 되지 않는 곳에서 날개 한 번 펴지 못한 채 짓눌려 살다 생을 마감한다. 한 잔의 우유를 얻기 위해 송아지는 태어나자마자 어미와 강제 이별을 하게 된다. 자연에서 송아지는 최대 1년까지 젖을 먹는데 그만큼 우유 생산량이 줄기 때문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정전> 동포은에서 금수초목까지도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라고 밝혀주고, 자리이타로써 생활하도록 말씀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부연하자면 자리이타는 비단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개념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의식하든 의지하지 않든 매일 식탁에서 생명들을 마주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어디로부터 어떻게 식탁에 오르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지나치기 쉽다. 비단 먹는 것뿐 아니라 입는 것, 우리가 사는 공간을 구성하는 데 있어 다른 생명들의 직·간접적인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산속에서 자급자족하지 않는 이상 현대사회에서 소비하는 재화의 대부분은 타인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더 따뜻하거나 보기 좋은, 혹은 낮은 가격으로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동물들의 자유가 제약 당하고, 모성마저 억제 당하는 고통이 당연시 된다.

동물 관련단체들이 윤리적 소비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소비의 변화를 통해 인간을 위해 희생당하는 동물의 수를 줄이거나, 그 고통을 최소화하자는 취지다.

따라서 윤리적 소비는 나의 소비로 희생되는 동물의 고통을 줄이는 자리이타적인 삶의 출발점이며, 동포보은의 일부이기도 하다. 또 정의는 취하고 불의는 버리는 일상에서의 작업취사 공부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윤리적 소비운동은 사회와 대중의 취사공부이자, 보은행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동안 우리 교단에서는 다른 동물의 생명을 취하는 육식에 지나치게 관대한 분위기가 조성돼 왔으며, 제품을 고르고 사용하는 데 있어서도 다른 생명에 대한 자리이타의 정신이 반영됐다고 보기에는 아쉬운 측면이 있다.

원불교에서 말하는 개벽은 단순히 개개인이 교리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것으로(출발점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완성될 수 없다. 이는 대중과의 호흡을 통해 사회와 세상을 바꾸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미 사회에서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대종사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변화의 노력들이 이뤄지고 있고, 교단에서는 이를 뒤쫓기 보다는 교법이 사회를 바꾸고 대중의 삶을 이끌도록 다양한 운동과 실천이 확산되길 기대한다.

/여의도교당

[2018년 3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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