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하 교도

 

시대적 종교, 원불교 통해 부모은 깨닫게 돼 
아내도 선방모임 통해 108배 수행과 기도생활

[원불교신문=고도하 교도] 나는 어머니의 각별한 사랑 속에 자라며 어머니의 은혜를 늘 마음속에 간직하며 살아왔다. 힘겨운 삶의 연속이었던 어머니는 63세 되던 해,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한쪽 팔과 다리의 마비로 보행을 할 수 없는 불행을 맞이하게 됐다. 

어머니는 병환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노상 절에 다니며 불공을 올렸고, 어린 시절 새벽이면 청수를 떠놓고 자식들을 위해 항상 기도했다. 어쩌면 그 신앙의 힘과 자식을 위한 일념이 홀로 어린 5남매를 키워내시는 큰 힘이 됐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나는 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녔던 신앙의 끈이 있었기 때문에 불법을 공부한다는 원불교에 쉽게 나올 수가 있었다. 교당의 첫 느낌은 신선했다. 

특히 원불교는 물질만능의 시대에 오히려 불행하고 정신이 허약한, 고통 받는 중생들의 삶을 예견한 대종사가 그들을 제도하기 위해 '이제 종교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일깨워 준 시대적 소명의 종교라는 점이 나를 또 한번 사로잡았다. 

나는 사은 중 부모의 은혜에 대해 공부하며 부모가 아니어도 이 몸을 세상에 나타내고 설사 나타났더라도 저절로 자양될 수 있었을 것인가 생각하며 어머니의 헌신과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헤아리게 됐고, 어머니를 더욱 잘 보살피는 일에 정성을 다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지난해 겨울 78세를 일기로 고단하고 힘들었던 삶의 여정을 접고 열반에 들었다. 유난히 꽃을 좋아했던 어머니는 '천지화'라는 법명을 받고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 법명으로 교당에서 천도재를 올렸다.

정법에 귀의하도록 인도해 드렸고, 완전한 해탈천도를 축원 올리며 어머니와 나의 인연이 이 회상에서 불연으로 다시 만나기를 염원하니 한 없이 깊은 슬픔도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았다. 

나의 아내도 교당에서 자비단 중앙을 맡고 있다. 법회 사회도 보고, 강연도 하고, 매주 수요일에는 선방모임으로 108배 수행과 기도를 하면서 이제 조금씩 공부하는 재미를 느끼며 도반들과 형제보다도 더 가까운 인연으로 만나고 있다. 

직장에서 내가 하는 일은 고소 고발사건을 조사하는 일이다. 때로는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를 푸느라 직장동료들과 밤 늦도록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다음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고통스러운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러다가 대종사의 가르침을 깨닫게 됐다. "손에 부채를 들고 있으면서 더위를 당하여 쓸 줄 모른다면 부채 있는 효력이 무엇이리오"라고 말씀했는데, 불법을 활용하여 생활의 향상을 도모하라는 대종사의 말씀을 알아차린 것이다. 

돌이켜보면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공부를 통한 이해심과 온전하지는 않지만 멈추는 힘이 생겼다는 생각에 스스로 대견했다.  대종사의 가르침을 받들게 된 것은 큰 행운이라 생각한다. 그런 바탕에는 교무님이 말씀한 매일 조석심고 올리기, 경전읽기, 좌선 등을 실천해보고 법회를 통해 도반들과의 만남으로 서로의 공부법을 주고받는 회화시간들이 그 힘의 원천이 된 것 같다. 

나는 요즘 교전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몸에서 교전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겠다 싶어 법회에 나갈 때는 물론이고, 출·퇴근할 때도 교전을 들고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단순히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대종사의 가르침을 생활에 대조해 보면서 더 큰 기쁨과 감사를 느끼고 있다. 

교당생활은 4년 차이지만 어느덧 내 나이는 50대 중반을 넘어섰다. 어떻게 온전한 깨달음을 얻고, 온전한 취사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떤 경계에도 금강석처럼 단단하고 흔들림 없이 의연하며, 희로애락의 근원적 고통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 깊이 생각해보며 나의 삶이 더욱 은혜롭고 감사하고 행복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힘들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대종사가 크게 열어 놓은 새로운 불법의 길로 인도해 광대무량한 혜복을 누리도록 해보겠다는 큰 서원을 세우고, '감사생활'을 유무념 표준으로 삼고 끊임없이 정진할 것을 다짐한다.

/화해교당

[2018년 3월 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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