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역사에서 문화적으로 가장 융성한 시기를 찾는다면 숙종, 영조, 정조 3대에 걸쳐 진행됐던 진경(眞境)시대를 꼽는다.

이 시기에는 중국의 북종화, 남종화를 수용해 '진경산수화'가 창안됐고, 중국의 신화 서왕모와 신선들의 이야기가 담긴 '요지연도'를 수용해 조선의 선비와 결합한 '신선도'가 탄생한다.

또 송강 정철의 한글가사 문학과 서포 김만중의 구운몽, 사씨남정기를 비롯한 박씨전, 장화홍련전, 춘향전, 흥부전 등 한글소설이 등장하고 서예에 있어서도 옥동 이서와 원교 이광사 등으로 대표되는 동국진체가 등장했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이란 말도 이 시기에 나왔다. 연암 박지원은 그의 문장론인 <초정집서>에서 '참으로 옛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통할 줄을 알고 새것을 창안해 내면서도 근거가 있다면 이 시대의 글이 옛 시대의 글과 마찬가지일 것이다'며 그 뜻을 제창했다.

그의 말처럼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의미는 '옛것을 익히고 나아가 새로운 것을 안다'는 <논어>의 '온고지신(溫故知新)'보다 더 적극적인 표현이라 하겠다. 온고지신이 옛것을 알아야 새로운 것에 대한 분별력이 생긴다는 앎의 문제라면 법고창신은 옛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실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개국 후 2백여 년간 중원문화를 흠모하던 조선에게 대국 명나라가 망하고 오랑캐라 여기던 만주족 청의 부상은 충격이었을지 모른다. 진경시대를 열게 된 시초가 비록 망국 명나라를 대신해 중원문화의 적통임을 자부하며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주체적으로 수용하려 한 자주적 문화운동이란 것을 알고 본다면, 소태산 대종사가 정신개벽을 주장하기 이전에 물질개벽을 논한 이유를 엿보게 된다.

불법을 주체로 삼은 네 가지 이유를 밝히고서도 유불선을 포함한 모든 종교 교지를 통합활용해야 하고, 그것도 부족해 모든 학문도 섭렵할 줄 알아야 하며, 과학과 도학의 병행, 영육쌍전과 이사병행을 주창한 그의 의지에는 청나라 선진문물과는 비교도 안될 물질문명 세계가 도래할 것을 예견했기 때문이리라.

정신개벽이란 이러한 물질개벽 시대를 주체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자세와 노력이 있은 뒤에야 조선의 진경문화가 꽃피웠던 것처럼 비로소 가능한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박지원은 법고창신을 두고 옛것에만 얽매이면 구차한 인습으로 전락하고, 새것에만 쏟다보면 정체불명의 얼치기가 돼버림을 또한 경계했다.

근 60여 년을 관행처럼 되풀이 해온 형평성을 우선시한 인사순환정책은 시대를 리더하는 전문가 양성에 실패하고 의욕없는 타성적 조직 문화를 초래했다. 반대로 급변하는 시대라고 하지만 몇일의 정기훈련만 받으면 법위훈련이 인정되는 기이한 현상도 되풀이 되고 있다.

법고창신이 고전의 유물이 아닌 현재 경영과 정책의 기준이길 바란다.

[2018년 3월 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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