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성자, 꼬꼬 김'…김혜심 교무

출가자의 삶 49년. 반백년의 세월을 소록도와 아프리카 등 지극히 험난한 곳에서 지극히 낮은 이들과 함께 해온 중타원 김혜심(中陀圓 金慧心) 교무. '아프리카의 성자, 꼬꼬 김'으로 알려져 있는 그의 인생역정은 한 편의 다큐로 제작돼 원음방송 특집으로 방송되기도 했다. 그의 어디쯤에서, 오직 교화 그 절실함이 빚어낸 강인한 힘이 나오는 것일까. 질문 하나 마음에 담아두고 그를 만났다.

[원불교신문=이여원 기자] "일생이 금방이구나, 칠십의 생이 너무 금방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어요. 살아온 발자취도 되돌아봐지고, 앞으로 남은 시간 어떻게 살아야 하나 새로운 자각이 들기도 하고.(웃음)" 정작 자신은 아직 다큐를 보지 못했다며 미소를 보이는 그. 미소 담긴 그의 눈이 그윽하다.

"꼬꼬라는 말은 아프리카 말로 할머니라는 뜻이에요. 아이들이 꼬꼬 김이라고 하니, 김 할머니라고 부르는 거지요. 아프리카 코흘리개 꼬마들이 맺어준 인연이에요." 그렇게 아프리카와 인연 맺어진 꼬꼬 김, 그러나 그 이전에도 그가 있던 자리는, 누구에게라도 생소했던 곳, 어쩌면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곳, 소록도였다. 
 

사람은 태어날 때
저마다 하나씩의 소명이 있다.
할 일이 있다는 것은
무한히 행복한 일이다.
자긍심과 긍정적인 생각으로 
대종사님 법을 등에 업고 
실천하며 공부하는 삶을 살자

소록도 개척교당, 불연이 맺어준 곳
그는 약사 출신이다. 중앙대 약학과를 졸업할 당시만 해도 여성 약사는 드물었다. "그 시절, 서울교당에서 하숙을 했어요. 부모님이 독실한 교도셨지요. 6년 동안 생활하면서 교무님과 한 방에서 살았어요. 그때는 교무 강습(훈련)을 한 달간 날 때인데, 교무님이 평소에 입고 있던 검정치마 흰저고리를 방에다 걸어놓고 가셨어요. 그런데 한번 입어보고 싶은 맘이 들더라구요.(웃음)" 

그래서 입어봤는데 몸에 딱 맞더라며 웃음 짓는 그. 옷보다는 그의 마음이 먼저 원불교에 와 닿았을 터. 그는 당시 한 방에서 생활했던 유성일 교무의 인품을 이야기했다. 말없이 솔선하는 교무의 모습은 이후 그가 걷는 성직의 길에 주춧돌 같은 것이었다.

그의 삶은 유복했다. 부모님은 익산에서 주유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대학원 2학년 때였는데, 밤11시쯤 됐을까.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주유차가 들어와서 주유하다 큰 불이 났는데, 마감뉴스에 나온 집이 너의 집인 것 같다고. 부모님이 운영하던 주유소에 불이 난 거예요. 워낙 큰 화재라 군산비행장에서 헬리콥터가 떠서 상공에서 약품을 뿌려 진화작업을 했어요. 그 사고로 오빠가 중화상을 입었는데, 일주일도 안돼서 돌아가셨어요. 그때 충격이 참 컸지요."

오빠의 죽음을 통해 그는 삶을 다시 보게 됐다. 원기55년(1970), 그는 출가의 길에 들어섰다. 

"박사과정 공부할 때 출가하고, 원광대학 약학과가 생긴 지 얼마 안 된 시기여서 약학과 강사를 하던 시절이었어요.  신문에서 소록도 관련 기사를 보게 됐는데 의료 인력이 없어서 힘들다는 내용이었어요. 여름방학(1976) 때 소록도에 갔어요. 방학 한 달 동안만 있으려고 여름옷만 가져갔던 것이 가을지나고 겨울지나 수학기간이 끝났죠."

소록도에선 그를 원했다. 그런데 그는 교단에서 발령을 받아야 하는 성직자였다. 그는 교단을 설득했고 우여곡절 끝에 허가를 얻었다. 원기62년 소록도 개척교무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교화부장(좌산상사)에게서 받은 축소판 전서와 함께 '교당 세 개는 만들어야 한다'는 당부를, 그는 온전하게 실천했다. 그렇게 8년을 살았다. 

그리고 그는 다시 원광대 약학과 교수직을 맡아 학교로 복귀했고, 봉사단을 조직해 방학때 마다 소록도를 찾아 의료봉사를 했다. 학교에 재직하면서 그는 서울지역 청운회를 담당하는 교무로 겸직발령을 받았고,복지관을 건축 운영하기도 했다.

실로 무서울 것도, 힘들 것도 없었던 그의 열정이 교화로 꽃 피던 시절이었다. 당시 잊을 수 없는 일화들을 회상하는 그. 그리고 그는 말한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날 때 저마다 하나씩의 소명이 있다"라고.

아프리카의 어머니, 꼬꼬 김
원광대 약대 학장까지 지냈던 그는 교수직을 포기하고 아프리카로 떠났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그 곳의 수도 프레토리아 북부 베르그 애비뉴 382번지. 이곳이 원기81년(1996) 아프리카의 첫 번째 원불교 교당이 생긴 곳이다. 그런데 3년째 되던 해,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날아왔다. 6개월마다 갱신하던 비자만료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이유였고, 교육사업을 위해 그간 준비했던 모든 일들이 무산되는 순간이었다. 

1년간의 준비, 3년간의 정착과 교화의 세월을 뒤로하고 그해 연말까지 떠나야 했던 이민국의 추방명령. 그는 돌아서야했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당장은 떠나와야 했지만, 다시 준비하고 나가야 한다. 서원을 더 단단히 챙기고 기다리자. 우리의 서원이 그 길을 열어줄 것이다."

아프리카 교화를 위한 그의 도전은 멈출 줄 몰랐다. 이후 남아공 이민국의 교화 가능성 타진 등 그가 전하는 이야기는 한참 동안 계속됐다. 간절함이 배어있는 말은 듣는 이의 마음에 그만큼 와 닿는 법. 그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사연이 전하는 안타까움과 가슴이 쿵 내려앉을 감동이 여러 번 교차됐다. 

까풍아와 라마코카, 아프리카 남쪽 스와지랜드와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김혜심 교무의 아프리카 개척교화는 멈춤이 없었다.

개척교화, 그대로가 아프리카의 역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동쪽의 나라 스와지랜드 왕국.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모잠비크를 경계에 둔, 남반구에서 가장 작은 나라. 수도 음바반에서 80킬로미터 떨어진 곳, 막바지 13킬로미터는 비포장도로로 엄청난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도착한 해발 1천1백 미터의 오지, 그곳 까풍아의 개척교화는 그대로가 까풍아의 역사가 된다. 

스와지랜드 오지 까풍아에서 교육과 의료보건 활동을 펼치는 내내, 그는 끝없이 대물림되는 가난을 끊을 방법을 고민했다. '여성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그래야 가난을 벗고 아이들 교육도 제대로 된다'고 생각한 그는 주저없이 실천했다. 한국에서 들여온 20대의 재봉틀로 시작된 여성개발사업, 그곳이 바로 원기92년(2007) 원불교 여성회와 한울안운동의 후원으로 문을 연 한울안 여성센터다. 

"재봉기술을 가르쳐 교복을 만들고, 뜨개질로 모자와 목도리를 짜서 판매도 했어요. 수익을 배분해 주니 현지 여성들의 시선과 삶에 대한 의지가 달라지기 시작했죠.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기술이 문제가 아니라 정신교육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스와지랜드 말로 '감사생활', '자력생활', '잘 배우기', '잘 가르치기', '공공물건 아껴쓰기' 등을 작업장에 적어 놓았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 '일상수행의 요법'을 현지인들은 작업 전과 후, 큰소리로 함께 읽었다. 

이후에도 식수공사, 식량구호사업, 송아지 목축사업, 환경보호운동, 아프리카 개발을 위한 국제포럼, 작은 음악회 등 그의 아프리카 개척 교화는 멈춤이 없었다. 까풍아와 라마코카, 아프리카 남쪽 스와지랜드와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원불교에서 온 '꼬꼬 김', 그는 그렇게 아프리카의 어머니였다. 

그가 후진들에게 당부한다. "크게 볼 때 100년은 창립초기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는 할 일이 너무 많아요. 할 일이 있다는 것은 무한히 행복한 일이지요. 자긍심과 긍정적인 생각으로 대종사님 법을 등에 업고 실천하며 공부하는 삶을 살았으면 해요."

[2018년 3월 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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