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지은 교무] 대문 단속과 물품 간수를 철저히 하라 한 대종사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부주의로 이를 도둑맞은 사건이 등장한다. 이 장은 지도인의 입장과 지도 받는 이의 입장, 두 측면에서 배움을 얻을 수 있는 법문이다. 

먼저 지도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만일 부모, 교사, 선배 등의 위치에서 자녀나 후배 등 지도 받는 이에게 어떠한 일을 신신당부했는데, 그들이 제대로 챙기지 못하여 그만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적어도 '내가 뭐라고 했어' 한 마디 정도는 따끔하게 해주고 싶은 것이 보통 사람의 심리 아닐까. 

그러나 소태산 대종사는 뜻밖에 '근심하지 말라'며 제자들을 안심시킨다. 덕분에 앞으로 정신을 차려 크게 주의를 하게 될 것이므로 간밤에 일어난 약간의 물품손실은 그 선생을 대접한 학비로 알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의 마음이 얼마나 감동을 받았을 것이며, 그 뒤로 얼마나 철저히 문단속을 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지도인의 입장에 있을 때, '거 봐. 내 말 들으라고 했지'라고 하고 싶은 순간이 온다면, 실시품 4장을 떠올리자. 내가 혼내고 싶은 이유가 과연 상대를 '제도'하고자 함인가, 내 말을 안 들은 괘씸한 상대를 '단죄'하고자 함인가. 여기에 중생과 부처의 차이가 있다.   

한편 지도 받는 이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면, 과연 나는 대종사의 말씀을 얼마나 땅에 떨어지지 않게 받들고 있는지 묻게 된다. 성인은 우주의 이치를 보아다가 세상의 시비이해를 건설한다.

천지보은 조목, 솔성요론 조목 등 해야 할 조목들을 지켜야 하고 계문을 어기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윤리 도덕적이어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육도사생으로 진강급하는 순환 속에서 우리를 진급으로 가게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치를 보아 '문단속을 하라, 엿목판 간수를 철저히 하라'고 말한 대종사의 당부가 〈정전〉 전체에 걸쳐 해야 할 조목과 말아야 할 조목을 내려준 대종사의 당부와 다른 것일까? 나는 그 본의를 얼마만큼 깨달아 나의 엿목판 간수를 철저히 하고 있는가.

하기로 한 일이라면 하는 것이 정의이다. '설마', '나중에', '한번쯤은' 하는 마음에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않아 생기는 여러 사건 사고들을 요즘 유독 많이 접한다.  '건물 비상구를 막지 말라', '작업현장 안전수칙을 지켜라'와 같은 규칙은 우리의 생명을 보호해주는 고마운 법이다. 이런 법률 배은의 결과로 일어난 참상을 우리 사회는 최근에도 겪었다.  

배은의 결과로 고통 받고 강급 되지 않도록, 이치를 보아 우리가 해야 할 바, 하지 말아야 할 바를 일러주는 종교가를 자모(慈母)라 한다. 이것을 우리가 절실히 깨쳐 알아서, 〈정전〉 한자 한자를 귀히 알고 생활에서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한다면 우리 삶에 더 큰 재난을 막을 뿐 아니라 낙원으로 가는 길을 열어갈 것이다. 엿목판을 잃고, 화재로 귀한 목숨을 잃는 가슴 아픈 일을 겪지 않고도 말이다. 

부디 부주의로 인해 일어난 우리 사회의 모든 비극들이 앞으로의 사고를 막아준 '큰 선생'이 되기를 바란다. 

/미주총부법인

[2018년 3월 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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