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일 교무·경남교구장.

 

계 만날 때마다 공부할 때가 돌아온 것을 염두에 잊지 말고
하고 또 하는 것이 마음 알아차림, 마음공부의 요체다

[원불교신문=김경일 교무] 약 40년 전, 운 좋게도 인도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게스트하우스에 묵게 되었는데 천장에서 도마뱀이 음식을 내려다보면서 혀를 날름날름 거렸다. 침실에도 어슬렁거렸다. 바닥에도 천장에도… 소름이 쫙 끼쳤다. 놀라서 데스크에 전화했더니 이 사람들이 웃기만 했다. 알고 보니 인도에서는 그게 일상이었다. 최근 우연히 페이스북에 실린 류시화의 인도여행기를 보니까 나와 똑같은 경험을 했다. 

그런데 류시화 시인은 여기서 아주 그럴듯한 명상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이름하여 이름 붙여주기 명상(naming-meditation). 그 내용은 이런 거였다. 우리 마음은 게스트하우스와 같아서 여러 생각과 감정들이 불쑥불쑥 찾아온다. 어떤 감정은 반갑지만 어떤 감정은 불청객이라서 짜증이 난다. 초대하지도 않은 감정과 생각들이 아무 때나 마음을 찾아와서 우리를 기쁘게도 하고 화도 나게 하고 놀라게 하거나 괴롭게도 한다.

이것들은 거침이 없다. 어느 틈엔가 순식간에 내 안에 들어와 있다. 심술도 묘해서 내쫓으면 쫓을수록 더 달라붙는다. 도망을 가서 꼭꼭 숨어도 어느새 내 속에 들어와 있다. 

이럴 때 네이밍 명상을 권한다. 슬픈 감정이 찾아오면 '어서와! 너 슬픔이구나. 많이 슬프지?'하고 받아주라는 거다. 고통스런 기억이 떠오르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 '안녕! 분노야. 또 왔네'라고 반갑게 눈인사도 하고. 이 명상법은 이름을 지어주고 인정해 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단다. 

그게 경계가 찾아왔을 때 마음을 안정하는 공부, 동(動)할 때 자성(自性)의 정(定)공부다. 경계란 인식 주체와 인식대상의 접점이다.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우리 본래마음은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만나면 요란함이 일어난다. 이때 고요하다 요란하다 하는 분별을 따르지 말고 다만 요란함이 일어남을 비추어 관조(觀照)하라는 거다. 요란함은 잠시 인연을 따라 일어난 것일 뿐이다. 실체가 없다. 환영(幻影)에 불과하다. 우리들은 그 환영에 속아 맞서고 씨름을 하면서 온갖 고통을 만들고 힘들다고 난리를 친다. 보조스님은 이 번뇌를 손님에 비유했다. 객진번뇌(客塵煩惱). 실은 옛 성인들은 다 그렇게 공부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선 명상에 들면 갖가지 마라가 찾아왔다. 산스크리트어 마라(mara)는 번역하면 일종의 환(幻)이고 헛것이다. '망상(妄想)'을 뜻한다. 경계는 원래 없다. 다만 인연을 따라 잠시 모습을 나타낸 환(幻)일 뿐이다. 마라, 번뇌, 경계는 본디 없는 것이다. 부처님 수행은 쉽고 간결하다. 마라(경계)가 찾아오면 결코 거부하거나 쫓아내지 않았다. 오히려 '어서와 마라. 그동안 잘 지냈니?'하면서 편견 없이 받아줄 뿐이다. 그러면 마라는 대결의지를 상실하고 스스로 소멸되었다. 

우리 마음 밭은 원래 곡식과 잡초가 없으나 인연을 따라 곡식도 나고 잡초도 나온다. 우리가 일어나는 마음을 어찌 할 수는 없다. 마음이 살아 있으니 나는 것이다. 다만 우리 수행자들은 필요한 곡식은 북돋우고 불필요한 잡초는 뽑아주면 된다. 일어나는 분별을 탓하면서 괴로워하는 것은 잘못된 공부다.

〈수심결〉에 여석압초(如石壓草)라는 말이 있다. 돌로 잡초를 누른다고 잡초가 안 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세게 눌러도 틈새로 잡초는 나오기 마련이다. 다만 알아차릴 뿐. 탓하지 말라는 거다.   

대산종사의 말씀이 생각난다. '경계가 오면 싸우지 말고 오래된 친구처럼 반갑게 대하라. 그러면 제 풀에 지쳐 시간이 되면 제 스스로 물러갈 것이다' 〈좌선법〉에서도 답은 명료하다. '망상이 침노하면 다만 망념인 줄만 알아라. 그러면 망념이 스스로 없어진다.'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이쁘다 밉다는 분별과 주착이 본래 없으나 다만 경계를 따라 일어나는 마음이 잠시 다녀가는 손님인 줄 알아서 그 실체를 알면 구차하게 싸우고 말 것이 없다. 

네이밍 명상은 끝없이 일어나는 크고 작은 욕망과 감정, 생각들에 대하여 '경계야 어서와'하고 반갑게 맞이하면 가볍게 경계를 넘어설 수 있다. '나마스테! 열등감' '굿모닝! 화남'… 그러면 여유가 생기고 미소가 지어질 것이다.

나는 잠시 화가 날 수는 있어도 늘 화가 나 있는 사람은 아니다. 나는 잠시 두려울 수는 있어도 늘 두려움에 떠는 인간은 아니다. 망상과 경계는 일상으로 있는 존재들이다. 다만 그것들이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알면 쉽게 자성의 정(定)을 만날 수 있다. 

극락이 어딘가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분별이 쉬고 주착됨이 없으면 바로 자성극락에 이른다. 경계를 만날 때마다 공부할 때가 돌아온 것을 염두에 잊지 말고… 항상 끌리고 안 끌리는 대중만 잡아가는 공부를 하면서 순서를 따라 수행하면 자성의 정(定)과 혜(慧)와 계(戒)에 문득 다가서 있다.

이게 새 문명을 열어가는 개벽인간의 조건이다. 다만 그렇게 되기까지 오래 오래 공을 쌓아야 한다. 일상의 경계 속에서 내공을 쌓아야 한다. 때로는 죽기를 각오하고 해야 할 때도 있다. 하고 또 하는 것이 마음 알아차림 마음공부의 요체다.

[2018년 3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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