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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의법향/ 김학인 원로교무
선진의법향/ 김학인 원로교무
  • 정성헌 기자
  • 승인 2018.03.14
  • 호수 188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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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있는 그대로 진솔하면 되는 거야/ 봄 여름 가을 겨울 희로애락 한 세상을/ 어디서나 한 그루 의젓한 인간 상록수이어라/ 가슴가득 텅 빈 충만의 기쁨이면 되는 거야/ 순 역경 세찬 물결 흥망성쇠 인생길을/ 천상천하 어디에 걸림이 없는 자유혼이어라.' 
문학과 책을 좋아했던 소년의 의기와 이상향은 드높았다. 그만큼 자유를 갈망했고, 순수한 진리를 탐구했던 연산 김학인(78·然山 金學仁) 원로교무. 그의 시 '도반'에서처럼 걸림없는 삶을 찾아헤매다가 만난 원불교는 신세계 그 자체였다.

 "괜찮은 글재주 탓에 교정작업은 도맡아 했지"


<닥터 지바고> 
충청북도 괴산군 정용리에서 삼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부모는 모두 농사를 지었지만 유난히 책을 좋아하던 아들 손에는 흙을 묻히지 않았다. 청주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고등학생으로서 보기 어려운 <현대문학>과 <사상계>를 즐겨봤을 정도로 학구열이 대단했다.

1958년 <닥터 지바고>를 쓴 파스테르나크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됐지만 수상을 사양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노벨상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닥터 지바고>는 세계적인 명작이었지만 당시 소련에서는 불온서적으로 간주했고 작가의 목숨도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결국 그는 니키타 흐루쇼프 공산당 제1서기에게 선처를 호소하는 대신 노벨상 수상을 거부해 자신의 안전을 얻는 방안을 택했던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사건은 그에게 대단한 충격이었다. 문학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가졌던 소년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결국 불문에 출가를 하고 만다.

혁신불교 여기 있다
하지만 그가 문학과 사상에서 입은 슬픔을 대신해 선택한 불교는 절망 그 자체였다. 당시 불교계는 불교정화운동이 한창이었고, 대처승과 비구니 사이의 물리적 충돌과 소송전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게다가 신식 학문에 심취했던 그에게 불교의 막무가내 서당식 교육은 욕구불만족을 불러왔고,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온 스님들의 콤플렉스는 그가 감당하기에 상상이상이었다.

양산 통도사에서 은사 스님을 모시다가 밀양 표충사로, 다시 부산 대각사로 옮겨다니며 행자생활을 했다. 그가 표충사에 있을 때 재가신자들이 오면 사찰 안내를 담당했는데 어느 날 '원불교는 혁신불교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 대각사에서 지내게 될 때 그는 원불교를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당시 경남교당(현 부산교당)을 찾게 된 그는 안이정 교무를 만났다.
"그때 향산님을 처음 뵈었지. 불교에 출가했는데 너무 시대에 안 맞다고 말씀드렸더니 불교개혁 이야기를 들려주시더라고. 시대화·대중화·생활화한 불교가 원불교라고. 내가 열의를 보이니까 익산에 있는 총부를 한번 찾아가 보라고 하셨지."
그는 승복을 입은 채 익산 총부로 향했다.

익산 총부 첫 인상
"총부에 와보니 일요법회 때라 사람이 많더라. 그때 송천은 교수가 고려대 졸업하고 정신원 사무실에 사무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어. 또 그때 만난 송영봉 교무는 승복입고 총부에 왔던 내 모습을 두고두고 이야기하곤 했지."

총부에서 그를 매료시킨 것은 소나무들이었다. 그렇게 아름답고 생생약동할 수 없었다. 청정도량이 따로 없었다. 좀 더 들어가 소나무를 구경하니 중산 정광훈 교무가 전지 작업을 하고 있었고, 그 밑에서 김현 교무가 사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그는 봉산 장정일 교무에게 소태산 대종사 성탑 안내를 받고 중앙선원에 머물렀다.
"중앙선원에 머무르는데 어느 날 저녁에 조실에서 나를 오라고 해서 갔더니 정산종사께서 계신 거야.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더라고. 처음 뵀는데 뭔가 기운이 있다 싶었지. 그때 조실에는 김대거 선생, 이백철 선생, 이공전 선생 등 10여 분이 모여 계셨지. 정산종사께서 대중들에게 삼동윤리에 대해 말해 보라고 하시던 그 장면을 뵌 것이지."

원기49년 교무부에서 간사근무를 하면서 상산 박장식 종사 큰 아들인 박제중 선생과 함께 계간지 <원광>을 집필했다. 원기50년에는 영산선원에서 중등부, 고등부 학생들을 대상으로 국어와 한문을 가르쳤다.

수준높은 학문의 세계
원불교로 출가한다는 아들 소식을 들은 부모는 익산으로 이사를 왔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절에 출가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받은 충격과 상실감은 몹시도 컸지만, 원불교에서는 출가를 해도 결혼할 수 있다는 말에 그나마 안심했다. 익산에서 탁구장과 상점을 크게 짓고, 아들 학비와 식비를 조달했다.

그가 교학대 불교교육과(현 원불교학과)에 다니면서 놀란 것은 수준높은 수업이었다. 특히 숭산 박광전 총장의 〈대종경〉 강의는 명쾌하면서도 핵심이 깊었다. 문산 김정용 교수가 강의를 하고나면 박 총장이 그 자리에서 간단명료하게 갈무리 강의를 하는 모습도 인상 깊었다. 류병덕 교수, 한정석 교수, 송천은 교수에게 받는 수업도 너무 재미있어 궁금한 것이 있으면 아침부터 문을 두드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분들도 다 당신들 시간이었을 텐데 생각없이 그랬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죄송하지. 모두들 참 순수하셨고 열정이 있으셨지. 절에서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많았는데 여기에 와서는 교통정리가 참 잘돼 있다고 느꼈어."

완벽한 마스터
사실 그는 여전히 원불교가 낯설었다. 불교에 출가하기까지 원불교의 존재를 전혀 몰랐기에 나름 독학을 하지 않으면 안 됐던 것이다. <회보> 등에 나오는 소태산 대종사 법설과 인물, 교단사를 개인별로 정리했다. 이렇게 정리한 자료는 그가 원기56년 원불교신문사에 발령받고 기사쓰는데 큰 도움이 됐다. 그러나 남한강 사건으로 <원불교신문>은 8면에서 4면으로 줄었고, 인원도 감축해야 해서 원기57년 원광고등공민학교로 전근하게 된다. 이후 다시 교화부에 근무하면서 <원광>을 집필했고, 괜찮은 글재주 탓에 총부에 있는 교무들이 글 발표할 때면 수정작업을 도맡아 하곤 했다.

원기61년 해룡고등학교에 발령받았다. 국어를 가르쳤는데 옛날 실력으로 도무지 학생들을 가르치기 어려웠다.
"참 전공이 무서운 거여. 국문과 안 나오고는 못 가르치겠구나 싶었지. 참 많이 부끄러웠어. 형식적으로 국문과 나와도 못 가르쳐. 완벽하게 마스터 해야지. 노하우가 나올 정도로 완벽하게 토가 안 떨어지면 설익은 거여. 원불교학과 나오고, <사상계> 좀 읽었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지."

이후 동산선원에서 이성은·박광수·설윤환 교무와 함께 훈타원 양도신 종사를 모셨다. 그때 신문사에서 같이 근무했던 이성은 교무와 함께 <동산선원보>를 냈는데, 동산선원에 공부했던 학생들은 이것을 보고 나중에 <교당주보>를 만들기 시작했다. 일종의 문화혁명이었다. 이어 원기71년 원불교출판사, 원기73년 문화부를 거쳐 원기74년 원불교역사박물관, 원기89년 교화훈련부를 끝으로 원기94년에 퇴임하게 된다.

불교와 원불교 차이
퇴임 이후에도 그의 문학에 대한 열정은 여전하다. 시집 출판을 준비 중에 있고, 원친회 학생들 가운데 판소리 하는 아이들을 위해 <일원의 광명, 새 세상을 여시었네. 원각성존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 판소리 대본도 제작해 놨다.

"정사(正邪), 공사(公私)만 구분이 되면 여래다. 후진국일수록 이게 안 되고, 선진국일수록 이게 잘된다. 신도안에서 잠시 대산종사님을 모실 때 기거하던 초가집 다락 문짝에 붙어있던 이 붓글씨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우리 집안 어른들은 이 부분이 다 정리된 분들이다. 내 자신이 정리 안되면 혈연도 법연도 속물이 된다. 정사, 공사만 정리되면 갑종 전무출신이다. 그 사람은 법열로 살고 법열로 솟는다."

그의 말에는 힘과 확신이 가득했다. 당시 그가 불교 행자시절에 몸서리 칠 정도로 겪었던 한계와 신세계였던 원불교의 차이가 이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처럼.

[2018년 3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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