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지은 교무] 한 제자가 출가한 지 여러 해가 되도록 거친 성행을 고치지 못하자, 그를 내보내자며 제자들이 탄원을 올리는 내용이 나온다.

도량의 풍기를 깨끗이 하자는 제자들의 호소에 소태산 대종사는 도량과 사회를 둘로 보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 가르쳐 그로 하여금 성불할 인연을 놓지 말게 하라고 한다. 도량의 부정만을 제거하여 사회에 옮기고자 하는 것이 원만한 일이 될 수 없다는 대종사의 일갈은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한 조직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구성원이 있으면 일정 절차를 거쳐 내보내는 것이 조직논리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장에서도 도량의 풍기를 깨끗이 하기 위해 한 명을 내보내자는 제자들의 의견에도 수긍이 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사회와 도량을 둘로 보지 말라는 대종사의 말씀은 참으로 심량이 광대한 부처님의 깨우침이다. 

포항의 한 불교 복지단체에서 시설을 짓고자 건축허가를 받고 기초 토목공사를 시작하려고 했으나 지역 주민들은 이 복지 시설을 '혐오시설'로 규정하고, 트럭까지 동원하며 공사를 방해해 난관에 부딪쳤던 일이 있다.

주민들의 반대 이유는 무료 양로원이 들어설 경우 오폐수와 쓰레기로 인해 상수원이 오염되고, 차량 증가로 인해 소음 등 각종 공해가 심각해진다는 문제였다. 당신이라면 집값이 떨어진다거나, 생활에 불편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감수하고 이들 시설의 건립을 기꺼이 찬성하겠는가?

만일 당신이 소태산 당대의 제자였다면, 문제가 된 제자를 내보내자는 회의를 했을 때 어느 쪽에 표를 던지겠는가? 내 뒷마당에는 안된다(Not In my back Yard)는 주민들이나 문제아의 추방을 논의한 제자들의 국량이 좁다고 마냥 비난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결국은 깨달음의 문제이다. 소태산의 취사는 눈앞의 손익 논리로는 결코 내릴 수 없는 결정이다. 자타의 간격이 없는 그 자리를 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심법이다. 소태산은 천지의 광대무량한 도를 체받아 편착심을 없이 하자고 말했다. 어렸을 때 어쩌다 마음 내어 내 방 대청소를 할 때 내 방에 있는 지저분하거나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놓곤 했다. 내 방이 깨끗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한 것이지만, 우리 집도 나의 공간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어린아이의 마음이었다.  

나, 내 가족, 내 사람, 내 편, 내 것, 이렇게 선을 긋고 마음이 한량없이 작아질 수 있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그러나 한 마음을 돌리면, 천지와 같이 광대무량 할 수 있는 것도 사람 마음이다. 어느 날 길가의 아름다운 소나무를 보고 우리 교당으로 옮겨다 심었으면 좋겠다는 제자 조송광에게 대종사는 "그대는 어찌 좁은 생각과 작은 자리를 뛰어나지 못하였는가"라며 차별과 간격을 초월해 큰 우주의 본가를 발견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와 너를 넘어서는 자리를 체받아서 그 흉내라도 낼 수 있을 때 진정한 자비심이 나올 수 있다. 법문을 통해서 꾸어서라도, 흉내내서라도 배울 일이겠지만, 결국 그 자리에 들기 위해서는 삼대력의 열쇠를 얻어야 할 것이며, 삼대력의 열쇠를 신·분·의·성으로 만들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미주총부법인

[2018년 3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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