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피해자 절실함 이용해 욕망 채워
본질적 권력관계의 문제이자 사회문제

지난번에도 '미투'운동에 대한 얘기를 했지만 솔직히 나 자신도 이렇게까지 운동의 파장이 커지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유력한 차기 대권후보로 꼽히던 정치인에서부터,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감독, 연극계에서  제왕적 권위를 자랑하는 연출자, 자타가 연기력을 인정하는 배우, 대학교수, 중·고등학교 교사, 종교인 등등 직업과 연령대도 다양하게 확산되는 중이다. 

특히 그 중 이윤택과 같은 경우에는 소태산의 삶과 깨달음을 주제로 하는 연극을 연출했던 사람이라 처음 그 뉴스를 봤을 때 당혹감을 누르기 어려웠다. 나중에 관련 뉴스들을 검색해보니, 이윤택은 밀양연극촌이나 연희단 거리패같은 연극공동체를 만들면서 원불교의 초기 신앙공동체를 이상으로 설정하고 있었다는 인터뷰도 등장한다. 

신앙과 명예, 능력과 열정. 이 모든 것들을 갖추고 있던 그가 왜 그런 괴물이 되어야 했을까. 적어도 고교 때부터 원불교 학생회에서 활동하면서 소태산의 가르침을 배웠던 이라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공연 마지막 날 연극 끝내고 나서 배우들과 함께 무대 위로 올라가 춤추던 이윤택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때 함께 손잡고 춤추시던 원로교무님들은 이윤택에게 스승의 입장이었을 텐데 대체 그동안 뭘 가르치신 것일까.

가만히 지켜보니, 미투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에게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특징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힘, 즉 권력을 쥔 입장이었으며, 피해자의 절실함과 약한 포지션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웠다는 것. 그리고 가해자들은 절대로 피해자의 입장에서 성추행 혹은 성폭행 사건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특정분야에서 얻게 된 권위와 명예를 힘으로 치환한 자들이 보이는 태도는 대부분 대동소이하다. 특히 정치적 역경이나, 힘든 개인사의 여정을 거쳐 안정된 지위를 얻게 된 경우, 특별한 선민(選民)의식으로 무장하게 되는 사례도 많이 보게 된다. 

"특별한 나를 위해 일반인인 너희들이 그 정도는 견뎌줘야 되는 거지" 
"한국이 배출한 세기의 천재인데 일반적 상식을 넘는 기행을 하는 건 너희들이 수용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러한 사례들은 모두 개인들이 특정한 위치에 오른 후에 갖게 된 힘(권력)이 인간적인 공감의 능력을 파괴해버린 경우라 하겠다. 힘을 가진 사람들-남자들-이 모두 다 괴물로 변하는 것은 아니며,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나마 상식 수준의 조심(操心)은 하고 산다. 

하지만 약자인 상대여성의 인간적 자존감을 짓밟고, 성(性)을 유린할 정도로 괴물이 되어 버린 이들을 조심시키고 제어할만한 기제들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피해자들의 고통어린 폭로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많은데, 이는 그만큼 가해자들이 가진 힘이 상대방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는 것을 방해하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켜왔음을 말해준다.

결국 이는 지금 터져 나오는 수많은 미투 사건들이 개별의 성적인 일탈이라기보다는 본질적으로 권력관계의 문제이자, 사회문제라는 여성학계의 주장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각의 프레임을 권력관계의 문제라는 점에서 교단 안에도 한 번 대입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연공서열과 교단 내의 직급에서 우위에 있는 이들이 상대적으로 약자의 입장에 있는 교무와 교도들의 선택권과 발언권, 활동의 의지를 위계에 의해 강압적으로 제한해버리는 일들은 없었는지 궁금하다. 혹시 이에 대해 문제제기하면 지금의 미투 가해자들처럼 "서로 합의 하에 행해진 것 아니냐", 혹은 "좀 더 나은 조직의 미래를 위해서 그 정도 힘든 것은 견뎌야 하는 것은 아니냐"고 반문하는 일이 있지는 않았을까.

이윤택이 공공연하게 원불교 교도임을 밝힌 기사들을 보면서 그가 신앙을 통해 무엇을 배우고, 어떤 것을 체화한 건지 이리저리 생각해보다가 거칠게 글을 써봤다. 진심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서울대종교문제연구소, 화정교당

[2018년 3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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