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과 미국의 정치·군사외교적 쟁점들이 연일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동북아 3국과 미국은 오랜 교류사에서 화해와 경색, 애증의 굴곡을 거듭 넘나들어왔다. 피차간에 이익상충과 시각 차이로 인한 불행한 결과를 피하기 위해, 지혜롭게 풀어낼 과제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동북아와 미국의 공식적인 교류가 시작된 19세기 후반 이후 반세기 넘도록 한국과 중국은 반(半)문명국으로 간주된 반면에, 일본은 서구열강과 맞먹는 문명국으로 승격됐다는 점이다. 그 핵심 요인이 일본의 문화전략이었다. 동서교류에서 우월적 선점을 차지한 일본의 문화전략에 대해 이번 회에는 일본 차문화, 다음 회에는 일본 선불교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일본 문화전쟁, 만국박람회장을 쟁터로
서구열강의 강압적 문호개방과 불평등 조약은 동북아에서 반(反)서양감정을 촉발했는데, 메이지(明治) 일본은 조선이나 중국과는 달리 서구열강과 동등한 수준이 되어 맞서고자 친서구정책을 택했다. 일본을 최단기간에 서구화하는 한편, 서양과 문화전쟁을 선언했다. 막대한 예산을 소요하여 만국박람회와 국내·외 문화예술인을 통해 치밀하게 계산된 이상적인 일본이미지를 서구권에 확산시키고 전시장을 정치적·경제적 이익확대의 장으로 적극 활용했다. 

자국의 서구화된 면모와 함께 다도를 포함한 전통적 측면을 강조하고, 서구취향을 저격한 문화예술을 상품화했다. 일본정부와 기업이 합력한 문화정책은 괄목할 성공을 거뒀고 일본의 국가위상을 끌어올리면서 정치적·경제적 이익을 산출하게 된다.

전 세계 수백·수천만 인파가 모인 만국박람회는 서양이 동북아를 직접 대면한 대표적 장소였다. 국익을 위해 자국 이미지를 원하는대로 만들어(image-making) 전시함으로써, 전시된 이미지를 실상으로 각인시킬 수 있는 전략적 장소였다. 각국이 국제사회에서 정치·외교·경제적 헤게모니와 국가이미지를 구축하는 수단으로 문화예술 전시가 활용됐다. 여기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낸 것이 일본이었다. 일본은 종교와 예술을 국가정신과 국가 정체성의 발현인 '국체(國體)'로 해석했다. 이에 일본 다도와 선사상은 일본국의 표상으로 부각되면서 일본이미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도, 일본 국가의 표상이 되다
국제전시를 적극 활용하지 못한 중국과 조선은 국익추구에 불리했던 반면에, 차, 다도, 미술을 포함한 일본 문화예술 전시는 자포니즘(Japonisme)으로 불리는 일본열풍이 서구권에서 대대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미국에서 일본취향은 1876년 필라델피아, 1893년 시카고, 1904년 세인트루이스에서 개최된 박람회를 거치면서 남녀노소, 신분계층을 막론하고 유행되어 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 약 40년 동안이나 지속됐다.  

일본은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부정적인 중국과 조선 이미지를 서구에 제시하기도 했다. 박람회장에서는 중국과 조선 전시와 비교되면서, 서구는 일본 문화예술이 동아시아에서 최상이요, 유럽 문명국들보다 탁월하다고 인정했다. 그리하여 동북아 3국 중 유독 일본은 '이교도'의 비(非)문명국 이미지를 탈피하여, 선진기술산업과 고도의 군사력, 탁월한 전통문화가 조화를 이룬 나라로 미국인의 상상 속에 자리잡았다. 

국가 이미지 형성과정에서 일본은 전통문화를 소개했고, 일본문화의 표상으로 다도를 부각시켰다. 박람회장에서 서구 지도층과 언론을 초청하여 다도의식인 차노유(cha-no-yu, 茶の湯)를 전통 춤, 악기 연주 등과 함께 선보였다. 

미국언론은 '예술이 일본의 모든 것에 침투해 있고, 예술적이란 말을 국가 전체에 적용할 수 있는 민족'이라고, 예술화된 일본이미지를 확산시켰다. 그리하여 오스카 와일드가 풍자했듯이, 서구에 알려진 대로의 일본이란 나라와 일본인은 존재하지 않되 다만 '일부 예술가들이 교묘하게 고의적으로 만들어낸 산물'이자 '하나의 양식(style), 절묘한 환상의 예술작품'으로서의 일본 이미지가 확산됐다. 

조선을 식민지화 하기 위한 중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을 앞두고 일본은 전시장을 동북아의 정치적 목적에도 활용했다. 일본이 시카고 박람회에서 인기 높은 대성공을 거둔 나라가 된 다음해 발발한 중일전쟁에서, 미국 언론은 일본이 전세계의 유익을 위해 '은자의 나라' 한국이 '중국 야만주의'에 귀속되지 않도록 주둔할 것을 주장했다. 

세인트루이스 박람회 때 진행된 러일전쟁에서 미국은 일본을 지지했고, 박람회장에서 일본미술품에 재현된 미일 우호관계는 카츠라-태프트 협정으로 결실을 맺었다. 구미에서는 일본인이 골상학적으로 아시아인보다는 백인과 더 흡사하다는 주장에, 앵글로 색슨 동맹에 가입시키자는 냉소적 제안까지 대두했다.

일본은 다도를 통해 치밀하게 계산된 일본 이미지를 서구권에 확산시키며 정치적·경제적 이익을 확대했다. 일본 다도의 집과 정원, 시카고 만국박람회(1893년).

'게이샤' 다도의 홍보사절이 되다
일본 다도가 서구 대중과 언론의 초미의 관심사가 된 배경에는 박람회장에 파견된 일본 유흥업계 종사자들이 있었다. 이국적인 생김새와 기모노, 공손한 태도로 무장한 '게이샤'로 일컬어진 이들이 전통 양식의 일본 찻집과 정원에서 매번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일본여성에 대한 서구 고정관념을 충족시켰고 일본전시의 홍보와 상업적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이국적인 일본식 정원, 다실과 다도, 게이샤로 구성된 조합은 '지상낙원'의 경험처럼 회자되고 막대한 이익을 거두는 주력상품이 됐다. 

수십 개국이 경합한 박람회장에서도 최고의 '볼거리'로 손꼽힌 일본여성들은 전통 다도를 행하고 문화예술품을 판매했다. 일본 전시판매장과 찻집은 눈요기를 원한 구경꾼이 넘쳐나는 인기를 구가했고 언론에 흥미로운 기사거리를 제공하면서 서양이 일본식 차문화와 친밀해지는 촉매재가 됐다. 

훗날 〈차의 책, The Book of Tea〉(1906년)을 출간해 미국에 일본 다도문화를 확산한 오카쿠라 가쿠조(岡倉覺三, 법명 오카쿠라 덴신 岡倉天心)가 커미셔너로 활동했던 시카고 박람회에서는 일본 바자와 다도의 집에서 차와 문화예술품 판매로 일본정부의 박람회 총 투자액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막대한 수익을 거뒀다. 세인트루이스에서는 그 이상을 거두면서 박람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전시 열군데 중 하나로 기록되는 성과를 올렸다. 이들 일본여성과 차문화 이미지는 무수한 그림·사진·삽화 등 미술, 문학, 오페라와 뮤지컬 및 온갖 광고와 패션을 포함한 다양한 대중문화를 통해 서구권에서 회자됐다. 

미국 엘리트층, 다도를 수용하다
이후 다도는 미국 정치·경제·문화계를 주도한 백인 보수사회의 '귀족계층', 보스턴 브라민(Boston Brahmin)을 포함한 동북부지역 문화예술계 엘리트층을 중심으로 확산됐다. 이들에게 특정 계층 간에 차문화를 향유하는 관습은 유한계급의 사회적 신분과 문화권력을 예증하는 수단이었다. 이 무렵 일본을 방문한 다수의 학자, 예술가, 후원자들이 다도를 체험했고, 미국에서도 즐길 수 있었다. 

미국내 다도문화 형성의 핵심에 오카쿠라 가쿠조가 있었다. 보스턴미술관의 일본미술 전문가인 그는 서구에서 일본문화 사절의 규범으로 평가되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인해 일본을 처음 인지한 대부분 서구인들에게 '호전국(好戰國)' 이미지에 대한 상쇄요소로 일본다도와 예술을 제시한 탁월한 문화전략가였다. 그가 저술한 〈차의 책〉은 작금에도 서구 학계와 문화예술계에서 일본문화론을 이해하는 고전이자, 가장 광범위한 영향력을 발휘한 차에 대한 책으로 간주된다.

일본 다도는 선(禪, Zen)사상과 더불어 근현대 서구사회의 물질주의 문화의 폐해에 대한 대안으로서 동양의 정신문화를 함의하는 의식으로 제시됐거니와, 다음 호에서는 D. T. 스즈키의 일본 선종, 특히 민족주의적 신불교(新佛敎)의 미국 유입을 다루어본다. 

/원광대학교 미술과

구사카베 김베이 다도, 1890년 Burns, Geisha

[2018년 3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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