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으로 인해 우리 법이 세계에 크게 드러나리라”


[원불교신문=강법진 기자] 원불교는 1916년 4월 소태산 대종사의 깨달음으로 시작됐지만, 회상의 기초를 세운 것은 9인 제자와 함께한 '정관평' 방언공사와 '백지혈인'의 법인성사라 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의 일이다. 무오년 3월, 소태산 대종사는 9인 제자와 함께 저축조합으로 모은 기본금으로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 간척사업을 착수했다. 갯벌을 막아 농토를 만든다는 소식에 주위의 냉소가 심했지만, 대종사는 간척사업을 통해 처음부터 '공익의 길'로 나가고자 했다. 

특히 1918년에 시작된 무오년 독감(스페인감기)은 전 세계 5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인류 최대의 재앙이라 불릴 만큼 무서웠다. 한국은 2년간 14만 명이 사망했다. 9인 제자가 방언공사를 할 때에도 무오년 독감이 전국을 위협했다. 정산종사는 이때를 일러 "일심의 힘은 위대하나니, 팔·구인이 삼동에 방언할 때에 얼음을 깨고 물 속에 들어가 일을 하였으되, 무오년 감기처럼 심한 때에도 아무 일 없이 지냈나니라"(<정산종사법어> 법훈편 47장)고 회상했다.

방언을 마친 정관평은 염해로 인해 수년간 변변한 수확을 내진 못했다. 하지만 주민들에게 농토를 제공했고, 새 회상 창립의 경제적 기초가 됐다. 일심합력으로 하면 반드시 이뤄진다는 인과를 깨달은 9인 제자들은 이후 '백지혈인'의 법인성사로 신앙의 맥을 견고히 했다. 교단은 이 두 가지 성업을 신앙·수행의 양대 축으로 삼아 영육쌍전·이사병행의 생활불교로 면모를 갖춰 왔던 것이다. 

드론으로 본 영산성지 일부이다. 1차 방언한 정관평 일부와 서해로 흐르는 와탄천과 대각전 및 보존건물이 위치한 영산성지, 영산선학대가 보이며 뒤쪽으로 이씨제각이 있는 범현동, 장다리봉, 대파리봉이 있다.

영산성지공동체 어제와 오늘
100년의 시간을 더듬어, 다시 그 현장을 찾았다. 그곳에는 '영산성지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영육쌍전·이사병행의 창립정신을 되살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영산성지를 둘러싸고 있는 영산사무소, 영산교당, 영산선학대학교, 영산성지고와 성지송학중, 영광교구, 국제마음훈련원이다. 

'영산성지공동체'는 생활공동체의 복원이 아니라 성지에서 원불교 정신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과 프로그램을 공동 개발해 성지의 알림과 지킴이 역할을 통해 교도와 일반인들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김성근 교무와 함께 영산성지공동체를 제안했던 당시 영산교당 김선명 교무는 "원기55년 이전에는 영산성지를 둘러싼 교당·기관이 한 가족처럼 살았다. 교단이 개교반백년기념대회를 치르면서 영산선원, 영산교당, 영산사무소를 독립시켰다. 그러면서 주민들 사이에 이해관계가 발생했고, 성지의 근본정신을 살려야 한다는 마음에 원기89년 영산성지공동체를 제안했다"고 말했다. 주민들의 삶을 향상시키고, 성지를 교리 체험장으로 만들고자 한 바람이었다.   

그후 영산성지공동체는 생태환경을 살리는 '정관평' 친환경 유기농법, 4월 대각개교절을 기념한 천여래등 점등식, 성지정화를 위한 클린데이, 대각개교절 은혜나눔, 8월 법인절을 기념한 법인기도를 기획해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 외 영산교당 민들레지역아동센터는 지역사회에 자리매김했고, 백수면 길룡리·구수리·논산리·장산리·천정리 주민들을 초청해 열었던 가을한마당은 현재 중단된 상태다.

100년 세월 넘나드는 정관평과 법인광장
3월 끝자락에 찾아간 영산성지 대각지에는 영산사무소(소장 남궁성) 교무들과 특별자원봉사자 등 4명이 뜨거운 봄볕아래 천여래등을 설치하고 있었다. 4월 한 달간 깨달음의 빛을 밝힐 천여래등 행사가 교단의 관심에서 비켜나면서 이들의 고민도 깊어졌다. 영산사무소 이응원 교무는 "천여래등 점등식은 대각의 기쁨을 점화하는 계기로 삼고, 교단 문화로 정착시켜야 한다"며 관심을 촉구했다. 

3월27일 오후, 영산성지공동체를 이끄는 6개 기관 실무진들이 모였다. 천여래등 점등식과 대각개교절에 나눌 은혜잔치(나눔) 역할분담을 논의하는 자리다. 시절인연 따라 만나고 흩어지는 이들에게 영산성지는 사는 동안 풀어야 할 숙제처럼 무겁다.

하지만 꾸준한 노력 끝에 공동체가 성공적으로 이끈 교화사업도 있다. 2004년 원청 40주년 법인기도가 모태가 돼 시작한 영산성지 '법인기도'는 매년 구인봉 기도순례로 이어오고 있고,  3차례의 방언공사로 완성한 정관평은 영산사무소 김형진 교무가 오랜 연구와 집념 끝에 친환경 유기농법으로 경작하는 관광명소가 됐다. 그 결과, 김 교무는 원기100년 유기농 명인으로 선정됐다. 그는 "공부와 사업이 따로 있지 않다. 정관평은 복록의 근원을 알게 하고 동정일여·영육쌍전의 근간을 세운 땅이다. 농사를 짓다보면 육체적 노동은 따라온다. 하지만 힘들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농사는 환경과 생명을 살리는 일이고, 성지는 더불어 사는 곳이어야 한다"고 일갈했다. 

13년째 영산성지에서 살고 있는 그가 바라는 것은 "대종사의 정신을 체험할 수 있는 숙소동이 탄생가 근처에 마련돼서 누구나 성지에서 편히 머물다 갈 수 있는 기도도량을 만드는 일이다"고 전했다. 현재 영산사무소 직원들이 변변한 숙소도 없이 보존건물에서 살고 있는 실정을 감안하면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원기8년 옥녀봉 아래 구간도실을 옮겨 지은 영산원.
김형오의 집을 대종사가 영빈관으로 사용한 적공실.

길룡리 잠자는 교도 깨우기
최경수 교무는 올해 다시 영산교당으로 발령을 받아 잠자는 교도 깨우기에 나섰다. "길룡리 주민들은 구인선진 자손들이나 다름없다. 그들을 교당으로 인도해 따뜻하게 살펴주는 일이 목표다. 마을 화동한마당과 마을법회도 여건이 되면 다시 살리고 싶다"며 의지를 드러냈다. 또한 최 교무는 영산교당이 대각지에서 가까운 만큼 순례객들이 언제든 머물다 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둘 계획이다. 

성지를 끼고 있다 해도 노령화속도가 빨라지는 농촌사회인지라 교화 현실은 녹록치 않지만, 최근 구호동 주변에 귀촌인들이 모여들고 있어 그나마 희망을 걸어본다. 완벽한 공동체는 없다. 더딘 걸음일지라도 영산성지공동체가 근원성지로서의 면모를 지켜가는 것이 이들의 숙명이다. 남궁성 영산사무소장은 "교단의 오랜 숙업이었던 영산성지 진입로의 돈사매입에 영산성지공동체가 먼저 힘을 합해 이뤄졌다. 그만큼 성지를 향한 마음에는 일심합력이 잘 된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다시, 소태산 대종사
100년 전, "바쁘다, 어서 방언 마치고 기도하자"고 했던 소태산 대종사. 영산성지 종두로 살았던 장종선 교도는 대종사 일화를 많이 남겼다. 이를 영산사무소 김형진 교무가 논문에 담았다. 그 중 하나다. "느그덜 생각해 봐라. 누가 사은을 가지고 말헌 성인이 있는가. 그런 도인이 아직까지는 안 나왔어. 앞으로 세상은 사은 속에서 사은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맨날 차디찬 방에서 자며 차디찬 팔찌만 끼고 살 것이다." 또 "앞으로 우리 선방을 어디다 많이 만드냐 하면, 영산에서 시작해 가지고 신용리에서 꽃이 피서 금강산에 가서 결복이다. 앞으로는 금강산에다 영모전도 짓고 선방도 짓고 그러먼 세계 사람들이 다 이리 오지 안 해? 내중에는 금강산으로 히서 우리 법이 세계에 드러나고 큰 법이 되고 천하에 둘도 없는 위대 받는 대 세상이 돌아올 것이다." 
100년의 원불교, 어디로 향해 갈 것인가. 

원기4년 3.1 운동 만세소리가 울려 퍼지자 소태산 대종사가 방언공사를 마치고 구인제자와 함께 창생을 위한 서원으로 법인기도를 올렸던 옛 구간도실 터이다. 이곳 법인광장에서 매년 8월 법인기도가 진행된다.
4월 대각의 달을 맞아 영산성지공동체 실무진들이 모여 은혜나눔을 위한 기획과 업무분담을 논의하고 있다.

[2018년 4월 6일자]

[무처선방]은 교화·교육·자선·문화·봉공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정해진 틀에 얽매이지 않고 꾸준한 정성으로 남 먼저 교법을 실천해 가고 있는 현장을 찾아가 집중 취재하는 꼭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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