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정도성 도무] '논어'의 첫 구절은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학이시습지 불역열호. 學而時習之 不亦說乎)'로 시작하는데, 이 구절에서 학습(學習)이란 말이 처음 등장하고 오랜 세월 지나 오늘날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다. '배움'이란 말의 탄생이다.

공자는 "열 집 정도가 사는 작은 마을에도 반드시 나처럼 진심을 다하고 정직한 사람이야 있겠지만, 나처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 했다.(〈논어〉 공야장 27장) 이 간절한 말씀은 공자 스스로 배움 그 자체를 좋아하는, 이른바 '호학자(好學者)'임을 표현한 말이기도 하지만,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사실을 에둘러 표현한 말이기도 할 것이다.

〈정전〉에서 특별히 '배움'을 강조한 법문은 '솔성요론'에 담겨있다. 물론 배움에 관해 언급한 법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자본위와 일상수행의 요법, 그리고 최초법어, 지도인으로서 준비할 요법에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지만 가장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강조한 법문은 솔성요론이다.

수행편 12장 솔성요론 3조는 특히 공자가 강조한 '호학(好學)'과 거의 똑같은 말씀이 들어있다.

'사생(四生) 중 사람이 된 이상에는 배우기를 좋아할 것이요.' 생명을 받아 태어나는 여러 갈래의 길 중에서 일단 사람의 몸을 받아서 태어났다면 배우기를 좋아해야 한다는 말씀인데, 뒤집어서 뜻을 헤아리면,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길이라는 뜻이다. 공자로부터 이어지는 이러한 말씀들의 흐름을 보면 참으로 성자들은 배움을 좋아하는 분들인 것 같다.

4조에서 '지식 있는 사람이 지식이 있다 함으로써 그 배움을 놓지 말라고 한 것도 이러한 흐름 속에 있다. 그 배움을 놓지 말라는 말씀이 자비의 말씀이다. 〈대종경〉 수행품 29장은  지식과 배움에 관한 법문이다. 그 사람이 물었다. '어찌하면 지식이 넓어지오리까.' '그대가 나를 찾아와서 묻는 것이 곧 지식을 넓히는 법이요, 나는 그대를 대하여 그대의 말을 듣는 것이 또한 지식을 넓히는 법이라,' 대종사도 늘 배움을 놓지 않았다.  

아울러 솔성요론 8조 법문도 진실로 치열하다. '일일시시로 자기가 자기를 가르칠 것이요' 자기가 자기를 가르치라는 건 부단한 자기혁신의 가르침이다. 왜냐하면 정작 두려운 것은 반성 없이 흘러가는 것, 손쉬운 관행이기 때문이다. 관행은 고정이요 경직이다. 정체요 불통이다. 그 관행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성찰과 배움이다. 

특히나 가르치는 직무를 수행해야 하는 사람은 더욱 솔성요론 8조 말씀을 새겨야 하지 않을까. 자기가 자기를 가르치지 않고서 남을 가르칠 수 없고, 자기 혁신 없이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건드릴 수 없다. '자기 마음 가운데 악한 기운과 독한 기운이 풀어진 사람이라야 다른 사람의 악한 기운과 독한 기운을 풀어 줄 수 있는 것'과 같다.(〈대종경〉 요훈품 30장)

다시 봄이다. 봄에는 학교를 열고 학생들은 배운다. 농부들은 땅을 갈고 씨를 뿌린다. 잘 가르치기 위해 잘 배워야 한다는 역설을 가슴에 품는다. 관행을 갈아엎는 배움과 자기 혁신의 새 봄이 되었으면 좋겠다.

/원경고등학교

[2018년 4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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