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장진영 교수

원불교의 수행법인 삼학은 수양과 연구, 취사에 있어 구체적인 공부법을 제시하며 각각의 훈련과목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선불교나 북방불교에서는 정(定)에 집중된 공부법이 보이기도 하는데, 원불교의 삼학과 불교의 수행법에는 어떤 차이가 있고, 또한 삼학에서도 수양이 체가 되는지 등의 궁금증을 문답했다. 불교학을 전공하고 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교수로 재직 중인 장진영(법명 진수) 교무를 만났다. 

 

 

정할 때 수양·연구가 주체, 동할 때 취사 주체 삼아 공부해야 
일원상의 수행…삼학 수행의 진리적 표본 제시한 공부법
삼학, 공·원·정 대응한 수양·연구·취사의 구체적 수행법

-'인생의 요도는 수양에 있고, 수양의 목적은 연구에 있고, 연구의 목적은 복과 혜를 구하는 데 있다'고 했다. 수양이 곧 삼학의 체가 되는가. 또한 수양 연구 취사의 연관성을 설명해 달라. 
이 질문의 문구는 초기교서 중 〈수양연구요론〉 서문 첫 구절이다. 〈수양연구요론〉 제1 정정요론(상)에 보면, "정(定)이란 것은 하나로 이에 정하여 모든 다른 도리가 나의 짓는 바에 더함이 없고, 저 허다한 법술이 세상을 의혹케 하는 데에 빠지지 아니할 뿐이요, 정(靜)이란 것은 하나로 정(定)한 데 돌아와서 다시 다른 데로 움직이지 아니하여 부귀영화도 능히 마음을 달래어 가지 못하고 금옥보패도 가히 뜻을 빼앗아 가지 못할지니 한 뜻이 정(定)한 데에서 매 다섯 마음(오욕 五慾)이 움직이지 아니한 즉 맹자의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한 것'과 노자의 '근본에 돌아와 고요하다 함'이 다 이 정정을 이름이니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인생의 요도는 삼학 중에서도 정신수양, 특히 '정정(定靜)' 공부가 그 체가 되고 연구와 취사를 통해 복과 혜를 구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삼학의 순서를 정(靜)에서 동(動)의 방향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먼저 각자의 정신을 온전하게 하고, 이를 바탕으로 일과 이치에 대한 분석과 판단을 통해 올바른 취사까지도 가능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실행에 있어서는 각각의 공부가 모두 필요하며, 함께 진행된다. 그러므로 동정일여이고 삼학병진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우 동과 정은 서로가 서로의 체가 될 수 있고, 삼학도 각각 체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정할 때는 수양과 연구를 주체로 삼아 공부하고, 동할 때는 취사를 주체로 삼아 공부하도록 한 것이다. 

-〈정산종사법어〉 경의편 13장에 '과거의 '혜'는 자성에서 발하는 '혜'에 치중하였지만, 우리 삼학공부의 '연구'는 모든 일과 이치에 두루 알음알이를 얻는 공부'라 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성에서 발하는 혜'란 어떤 것이며 우리의 알음알이와 어떻게 다른지 해오해 달라. 
석가모니불은 생사고를 벗어나 열반락을 얻는 중도(中道)의 가르침으로써 팔정도를 밝혔고, 이는 전통적으로 삼학인 계·정·혜로 정리된다. 삼학은 대승불교에서도 계승된다. 다만 자리이타를 중시하는 대승불교에서는 '육바라밀'인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로, 견성성불을 주장하는 선불교에서는 '자성삼학'으로 그 목적과 방식에 따라 다소의 차이를 보일 뿐이다. 
원불교의 경우도 이 삼학을 계승하는 한편 시대적 요청에 따라 그 공부의 목적과 대상과 활용에 있어서 재구성하고 있다. 실제 '자성삼학'을 밝힌 <육조단경>의 '심지법문'은 교강을 9개조의 실천조항으로 정리한 '일상수행의 요법'으로 재구성된다.

심지법문은 〈회보〉 52호에서 '심지가 어리석지 아니 하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혜를 세우자'로 심지법문이 처음으로 소개되는데, 이는 '심지무치자성혜(心地無痴自性慧)'를 그대로 풀어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1년 후 〈회보〉 62호에서는 '심지는 원래 어리석음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어리석음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혜를 세우자'라고 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변화는 '경계'에 대한 강조다. 경계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조건이나 상황을 말한다. 거기에는 물질적 환경인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뿐만 아니라 심리적 환경, 즉 의식의 대상인 법경(法境)도 모두 포함된다. 

불교 전통에서는 그 근본 원인을 무명, 즉 무아임을 여실히 알지 못함에서 그로부터 일어난 갈애와 집착, 이기적 행동에 의해 고통이 쉴 날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근본 무지인 '무명'을 타파하는데 집중했다. 한편 선불교에서는 자성이 본래 망념이 없는 것임을 자각함으로써 자성의 혜를 밝히고자 했다. 원불교에서는 무명의 극복과 자성의 회복, 자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경계의 영향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도록 했다. 

지금은 과거와 달리 환경의 영향이 훨씬 커졌다. 물질적 환경은 물론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처럼 우리의 관념에서 비롯된 심리적 환경에도 영향을 받는다. 새로운 욕구가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으며, 그 앞에 속수무책인 경우가 너무 많다. 그러므로 '근본 무지'를 타파하는 공부와 함께 '현실 무지'를 극복하는 공부가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자고 깨어나면 새로운 것들이 발명되고, 새로운 일들이 발생한다. 가만히 있으면 무지해지고 어리석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리연구'에서는 일과 이치를 함께 연구하도록 했고, 이치에 있어서도 대(大)자리뿐 아니라 소(小)와 유무(有無)도 함께 밝히도록 한 것이며, 구체적인 일에 있어서 시비와 이해까지도 자상히 밝힘으로써 경계를 변화시키는 적극적인 실행공부, 작업취사, 보은불공 등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사(事)라 함은 인간의 시·비·이·해를 이름이라 했다. 역설적으로 정리하면 인간사는 시·비·이·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인데, 시·비·이·해 속에서 살면서 어떻게 근본적으로 세상을 은혜라 할 수 있나. 한 예로 부당한 청탁을 강요받거나 부당한 차별을 당하고, 억울한 사연이 있는 이에게 어떻게 동포은을 설명할 수 있는가. 
만약 평소에 잘 알고 있는 이웃이 부당한 청탁을 해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이웃이 그래도 은혜로운 존재로 보일까? 쉽지 않겠지만, 이러한 상황을 대할 때, 철저히 인과보응의 원리에 따라 접근할 수 있다면, 근원적 은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우연히 돌아오는 고락이나 우리가 지어서 받는 고락은 각자의 육근을 운용하여 일을 짓는 결과'라고 했다. 지금 주어진 상황이 이전의 내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으로 지었던 결과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그동안의 삶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어떤 점에서는 이러한 갈등 상황을 통해 자신은 물론 주변 상황을 돌아볼 성찰의 기회, 지난 잘못을 바로 잡을 변화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이 또한 감사할 일이 아닐까? 또한 주어진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과보응의 원리에 따라 나타난 진리의 작용임을 '믿는' 진리 신앙을 통해서 이러한 상황을 야기한 이웃이 근원적으로는 나를 공부시켜주는 소중한 은혜, 부처임을 아는 것이다. 

해(害)에서 은(恩)으로 돌리는 공부와 동시에 자성을 세우는 공부도 반드시 필요하다. 일단 온전함을 잃지 않고, 상황을 밝게 분석하고 빠르게 판단해 시(是)는 취하고 비(非)를 버리는 실행을 옮겨야 한다. 부당한 유혹에 이끌려 불의를 범하지 않도록 마음을 챙겨 원치 않은 고해에 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여력이 되는대로 부당한 의뢰를 한 이웃을 깨우쳐 바르게 인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또한 동포보은이 되는 것이다.  

-일원상 수행이 곧 삼학 수행인데 따로 해석되는 경우가 있다. 일원상 수행과 삼학과의 관계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정리하자면.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원상 수행이 곧 삼학수행이다. 일원상 수행은 삼학 수행의 총론으로서 진리적 표본을 밝힌 것이라면, 삼학수행은 일원상 수행의 각론으로서 구체적 방법을 주로 밝힌 것이 차이라 할 수 있다.

교리형성과정에서는 '삼학'의 경우 〈최초법어〉의 '수신의 요법' 등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는데, 이미 원기5년 교강(敎綱) 선포 이후 핵심 교리로 자리했다. 반면 '일원상'의 경우는 공식 문헌상으로는 원기17년 '월보' 36호, 37호, 38호 등에서부터 수차 등장하고 초기교서 중 〈조선불교혁신론〉에서 공식화된다. 이 과정을 통해 원불교의 교리가 일원상을 중심으로 체계화된다. 

그 결과 〈정전〉 '일원상'장의 '일원상의 수행'에서는 삼학 수행의 진리적 표본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으며, 또한 '삼학'장에서는 일원상의 진리의 세 가지 속성이라 할 수 있는 공(空)·원(圓)·정(正)에 대응하여 수양·연구·취사의 구체적인 수행법을 자상히 밝히도록 했다. 

이처럼 일원상 수행과 삼학 수행은 총론과 각론의 차이는 있으나 본질적으로 다른 공부는 아니다. 그러므로 이를 근기의 차이로 생각해 일원상 수행은 상근기 수행자, 삼학 수행은 보통의 수행자로 생각하거나, 수행방식의 차이로 생각해 일원상은 돈오적 공부, 삼학은 점수적 공부라고 구분하는 이해방식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2018년 4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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