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혜성 교무] 볼 때마다 눈에 거슬린다. "저것이 도대체 수건일까 걸레일까" 서울에 계신 어머니가 평소 소화기관이 좋지 않은 딸을 위해 매실청을 담아 택배로 보내줬다. 택배상자를 열어보니, 매실청이 든 플라스틱 병 5개가 수건재질의 천으로 둘둘 말려서 포장돼 있다. 아마 병들끼리 부딪치거나 깨질까봐 걱정이 돼 포장한 것 같다. 

매실청을 잘 저장해두고 나니, 그 천 5개가 덩그러니 남아있다. 깨끗한 걸 보니 수건인 것 같다. 수건으로 쓰던 걸 보냈으면, 깨끗이 삶아서 다시 수건으로 쓰면 된다. 하지만 수건으로 쓰려니 문득, '만약에 걸레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도 생긴다. 평소에도 수건을 하루이상은 사용하지 않기에, 이것이 만약 걸레라면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문제이다.

"수건인지 걸레인지 알 수 없으니 찝찝하면 그냥 걸레로 쓰지 뭐, 걸레로 쓰자!" 하다가 "아, 그러기엔 너무 깨끗해 보인다. 그냥 수건으로 믿고 쓸까?" 그런데 그냥 수건으로 믿기에는 또 찜찜한 감정이 사무쳐 선뜻 아무런 결정도 할 수가 없다. 일단 조금만 더 생각해보기로 하고, 빨래바구니 안에 넣어뒀다. 

오후에 만난 지인에게 문득 이 이야기를 하며, 수건일까 걸레일까 궁금하다고 했다. 그러자 그 지인이 당연한 걸 모른다는 듯이 나무라듯 말한다. "아, 교무님은 결혼도 안하고 아이도 없어서 진짜로 모르시나 보네요. 당연히 그게 수건이지 걸레겠습니까? 자기 자식이 먹을 음식을 걸레로 싸서 보내는 부모가 세상에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아, 머리가 띵하다. 당연히 수건이었구나. 수건인 것이 당연한 것이구나. 생각해보니 그 말이 정말 맞구나. 그런데 이 당연한 것을 난 왜 몰랐을까. 나는 왜 수건일까 걸레일까 고민한 걸까.

소태산 대종사는 "자기가 도인이 아니면 도인을 보아도 도인인 줄을 잘 알지 못하나니, 자기가 외국 말을 할 줄 알아야 다른 사람이 그 외국 말을 잘 하는지 못 하는지를 알 것이며 자기가 음악을 잘 알아야 다른 사람의 음악이 맞고 안 맞는 것을 알 것이니라. 그러므로, 그 사람이 아니면 그 사람을 잘 알지 못한다 하노라"고 말했다. (〈대종경〉 인도품 59장) 

그 사람이 아니면 그 사람을 잘 알지 못한다는 말은 내게 있는 만큼만 다른 사람을 가늠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내 눈이 작으면 큰 사람도 내 작은 눈만큼만 알아보는 것이니, 나는 결국 상대를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크기만을 여실히 드러내는 중이란 말이 된다. 그래서 내가 상대에게 내리는 평가는 상대의 실상이 아니라 나의 실상이라는 무서운 공식이 성립된다. 이 일을 돌아보며 내 마음에 사랑이 없으니, 상대의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반성하게 된다. 

지극한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당연히 아는 사실인데,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을 잘 모르는 나는 못 알아채는 것이라는 생각이 미치자, 한 사람의 어머니 말고 세상의 어머니가 되고 싶다던 나의 서원이 한걸음 뒷걸음치고 있다는 두려움이 생긴다. 내 작은 사랑으로 부모의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음. '수건일까 걸레일까?' 하는 작은 의문에서 또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고 서원을 되돌아본다. 

/중앙중도훈련원

[2018년 4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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