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지은 교무] 기미년  만세운동 이후 일제의 감시가 심해졌다. 당시 일본은 한국내에 도인이 출현해 민심이 몰릴 것을 두려워하여 사찰 등에 대하여 감시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법인성사 이후 소태산 대종사가 금산사에서 몇 달가량  머무르는 동안에는 김제경찰서에서, 영산에 계실 때는 영광경찰서에서 며칠동안 심문을 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이렇게 평생에 걸쳐 수많은 억압와 제재를 당하였으나, 대종사는 그들을 조금도 싫어하고 미워하는 바가 없이 늘 흔연히 상대하였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다음 말씀에 그 해답이 있다. '그들은 그들의 일을 할 따름이요.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할 따름'이다.

상대가 하는 일에 대해, '나를 괴롭힌다'라고 생각하면 상대가 참으로 원망스럽다. 그러나 같은 일이라도 그가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의 일을 하고 있다'라고 이름을 달리 붙여보자. 대종사는 선한 사람이 선으로 세상을 가르치듯 악한 사람은 악으로 세상을 깨우쳐서, 세상을 가르치고 깨우치는 데에는 그 공이 서로 같다고 했다. 다만 악한 사람은 자신이 죄를 지으면서 세상일을 하게 되므로 악한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요훈품 34장) 이렇게 대종사는 선인과 악인을 보는 시각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간디는 "누구도 나의 허락 없이는 나를 상처 줄 수 없다"고 말했다. 바꿔 말하면 나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나를 상처 줄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러한 통찰이 있었기에 비폭력 저항의 항거가 가능했을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를 두고 당시에 조선의 간디라고 했다는 것도 우연은 아니리라.

그렇다면 악행이나 비행을 볼 때 탓하지도, 간섭하지도 말고, 그저 불쌍히 여겨줘야 하는 것일까? '그들은 그들의 일을 할 뿐이다'라는 말을 잘못 해석하면 자칫 수동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소태산이나 간디가 전하고자 한 진정한 메시지는 부당함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잘못되었다거나, 그저 부당하게 당하기만 하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할 따름이다'라는 당부는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에 우리의 태도나 반응이 좌우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어떤 경계, 어떤 시련에도 흔들리지 말고 꿋꿋하게 나아가라는 말씀이다. 한때 어느 드라마에서 '세상에서 가장 큰 저항은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것이다'라는 대사가 회자되었던 것은 그 한줄의 대사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와 같은 성자의 통찰을 전달했기 때문일 것이다. 

간사시절 집무실에서 식사하시던 어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다지 할 말이 없어도  그렇게 있는 것이 좋았다. 그러다 혹시나 결례인가 싶어 "식사하시는데 혹시 저 때문에 불편하지는 않으신지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어른은 "나 밥 못 먹게 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라고 말했다. "괜찮으니 그냥 있어도 된다"라는 말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마치 화두와 같은 되물음으로 아직까지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누구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주문처럼 이렇게 되뇌어 보자. "그는 그의 일을 할 따름이요, 나는 나의 일을 할 뿐이다." 

/미주총부법인

[2018년 4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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