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사현정·적폐청산 없으면 
개벽과 통일시대 견인 못한 채 집단적 낙오 못 면해

[원불교신문=정인화 교무] 촛불로 시작된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애국심이 적폐청산의 불꽃으로 타올라 마침내 피를 흘리지 않고도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로운 민주 정권에 이르게 하는 촛불혁명을 가져왔다. 위대한 국민들의 승리와 시민정신을 생각할수록 자긍심과 더불어 동포은혜와 법률은혜에 감사할 따름이다.

적폐란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폐단을 말한다. 한때는 바른 정신이나 가치 있는 제도라 할지라도 세상이 바뀌어 새로움이 필요할 때 변하지 않으면 그릇된 일이 되어버리기도 하는 것이 적폐다. 

우리나라가 새로운 사회로 변화하면서 과거의 잘못된 관행들이 재조명 되고 개혁을 통해 세상은 한결 맑아지고 있다. 소태산 대종사도 불교혁신론을 내놓으시고 시대화·생활화·대중화로 과거 불교의 불합리한 폐단을 혁신하여 새 회상 원불교를 열었다. 시대정신을 오롯하게 반영하라는 소태산의 가르침은 시간을 넘어 유효한데, 더딘 실천과 방법을 가진 사람들은 부끄럽게도 대종사의 제자들이 모인 우리인 것이다.

우리 교단 내부에도 전통이나 관행 아래 미루어온 과제가 쌓여있다. 가장 큰 적폐는 불평등한 정신적 관습이다. 출가자와 재가자의 위상과 역할은 말로만 동등할 뿐, 수직적이며 남성과 여성 교무의 권리와 대우 역시 양성평등의 가치가 부끄러울 만큼 기울어져 있다. 능력이 있으나 없으나 교무들은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여기며 교육과 교당의 운영을 주도하려 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파열이 얼마나 소모적이고 비생산적인지, 더 나아가 근원적인 교화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지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지자본위가 무색한 적폐중의 적폐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러다보니 재가자들은 주인의식이 결여되고 참여와 교화에 소극적인 채 관념적 권위의식만 높아가는 도인의 형상을 좇아가게 되어 교당과 교단의 정체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교무들이 하루속히 권위의 상을 내려놓고 교도의 일원으로 들어가 모시고 섬기고 칭찬하며 더불어 살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이대로 주저앉을지도 모를 일이다.

언제까지 여성교무들의 결혼과 머리를 묶어 둘 것인가. 이 또한 오래된 적폐임이 분명한데도 생각과 실천이 따로 간다. 유관순 누나 같다는 비아냥과 이슬람보다 못 하다는 일부의 비판을 흘려들어선 안 된다. 용금제도 역시 비현실적이다. 홀로 부모를 모셔야 하는 여성교무들의 경우도 결혼한 남성교무들과 같이 생활비 지급에 대한 논의를 거쳐 바로잡아야 옳다.

교단의 대표를 선출하는 데 있어서도 시대와 동떨어진 간선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마저도 대표성이 충족되지 않은 구조다. 누가 보더라도 수위단을 뽑는 선거인단의 구성은 재가와 출가의 적정비율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그 절차와 자격 또한 민주성이 결여되어 있다. 이러다보니 수위단원의 활동이 위축되고 종법사의 선출과정과 운영방식에서 독재성과 폐쇄성이 발생하는 제도적 적폐가 상존하는 것이다. 교단은 세미나와 태스크 포스를 만들어 개선을 꾀하지만 여전히 그 방식과 속도 면에서 시대가 요구하는 수준에 못 미치고 있다.

새로운 것은 때때로 두려운 일이지만 그 길이 진리라면 주저 없이 가야 한다.

500년 전, 죄를 져도 누구나 돈만 내면 살아서나 죽어서도 영원히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희대의 종교 사기극인 '면죄부'를 파는 막강한 로마교황청의 권력과 타락에 맞서 34세의 젊은 사제 루터가 목숨을 걸고 종교개혁을 부르짖어 마침내 거대한 종교 변혁의 불씨가 되었던 것은 기존의 만성화 된 관행에 맞서는 진리를 향한 신앙과 용기 덕분이다. 예수의 부활과 부처와 소태산의 대각 역시 새로운 세계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실행에 옮기는 고행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제는 우리 차례다. 일원의 대도 아래 뼈를 깎는 집단적, 영성적 자각과 과감하고 신속한 개선이 없이는 이미 시작된 개벽의 시대, 통일의 시대를 견인할 수 없다. 우리 내부를 거꾸로 보는 혁명적 자세와 실천이 요구된다.

/경남교구 마산교당

[2018년 4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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