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사 법만이 나를 영원히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
 

[원불교신문=정성헌 기자] 아무리 남 보기에 못 이길 고생을 하는 것 같아도 심중에 낙이 진진하다면 그것이 곧 천상락을 수용하는 것이라 했다. 힘겨운 바느질, 대중밥을 도맡았어도 어른들 모시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고, 먹을 것 하나 없는 현장에서는 몇 안 되지만 교도들 교화하는 즐거움에 흠뻑 젖어 살았던 다타원 김명기(81·多陀圓 金明基) 원로교무.
이 집에 살 때에나 다른 집에 이사해 살 때에도 그 사람의 재주는 변함없다는 말처럼, 김 교무의 천상락은 어디를 가든지 무에서 유를 낳는 원동력이었다.

어른들 모시는 재미
그는 전남 영광군 묘량면 삼학리에서 태어났다. 신흥교당에 다녔던 신심깊은 아버지는 한국전쟁 이후 그가 열 살 무렵 익산 총부에 있는 전팔근 교무 옆집(현 원광보건대 정문 맞은편)으로 이사했다. 자녀들을 전무출신 시킬 요량이었는데 오빠, 언니는 할머니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원광대학교에 다니는 예비교무들이 천사같이 고와 보였고, 총부가 궁금해 전팔근 교무 집에 가서 판자 울타리 구멍으로 구내를 내다보곤 했다. 그가 성장하면서 전무출신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그것에 기뻐할 아버지는 이미 열반했고, 그의 속내에 오빠와 올케는 안된다고 반대했다. 그런데 그가 전무출신 하고 싶다는 소문이 어떻게 났는지 총부에는 그 소식이 금세 퍼졌다.

그러자 박대완 교무 정토였던 김원명화 할머니가 어느날 그의 집에 찾아왔다. 오빠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더니, 오빠는 "니가 그렇게 원이니까 가볼라면 가봐라. 오늘 갔다가 저녁에 바로 와도 된다"며 출가를 허락한 것이다.

18세에 출가 허락을 받은 그는 중앙총부안에 위치한 양로당(현 원로원)에서 이타원 장적조 선진, 칠산 유건 선진, 경산 조송광 선진, 유산 유허일 선진, 영타원 이대교 선진 등 창립 당대의 쟁쟁했던 원로들을 모시며 바느질과 공양원으로 간사 근무하게 된다.

중풍 걸린 어르신 빨래에다가 세끼 식사 준비를 매일매일 하고서도 어른들 하얀고무신 모아 담아서 새하얗게 씻어 툇마루에 올려 놓으면 "누가 이렇게 씻었데" 하는 할머니, 할아버지 칭찬 한마디가 그렇게 기분 좋았다. 그렇게 살다보니 6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났다. 어느덧 공부하러 가야 할 때가 됐지만, 양로당 총무였던 김서오 교무가 1년만 더 살자고 사정사정해 산 것이 그렇게 된 것이다. 그래도 괜찮았다. 재밌으니까.

"나중에 중앙선원이 개학한다고 나를 데리러 오더라. 어른들이 아무도 가라고 안하셔. 그때 충산 정일지 선진(정광훈 교무 부친)이 꽃밭을 쓸고 계셨는데 '충산님 저 공부하라고 델러 왔는디 어쩐데요'하고 여쭈니까 '가그라. 가그라' 그러셔."

다시 간사근무지로
그에게 중앙선원에서 하는 공부는 만만치 않았다. 기숙사가 아닌 양로당에서 숙식하다보니 아침밥 짓고 설거지하고, 저녁에 오면 저녁밥 짓고 설거지 하는 생활이 반복됐다. 또 총부에 산다고 맡은 구역 청소도 다 하고 다녔다. 그런 모습에 김서오 교무는 보기가 참 딱했는지 총부 기숙사에 보냈으면 싶었다.

당시 기숙사는 전팔근 교무 집으로 이사가고 난 뒤 중앙선원 기숙사가 됐다. 그런데 사건이 터졌다. 김서오 교무는 총부 회의에서 '내가 공부 못 시키겠다'고 하면 총부 어른들이 알아서 그를 기숙사로 옮겨줄지 알고 그 말을 했는데, 반대로 '그러면 다시 직무시켜라'고 했다는 것이다.

"어느날 사감님이었던 김이현 교무가 나를 부르더니 '서오가 니 공부 못 시키겠다고 하니 다시 직무 잡히라고 한다. 그래서 대구교당으로 보내기로 했다. 보따리 싸라'고 하셔. 그때 난 함지사지가 뭔 뜻인지도 몰랐는데 '아이고 선생님, 아무리 원불교 정신이 함지사지라고 해도 난 그렇게 못해요'하고 나가버렸지."

그러고나서 미처 못한 청소를 다하고 양로원에 밥 먹으러 들어가자 당시 감원으로 온 윤순배 교무가 늦게 왔다고 날벼락같은 야단을 들었다. 느닷없이 대구교당 이경순 교무의 공양원으로 가라는 소리를 듣고나자 또 밥먹으러 늦게 온다는 야단까지 들으니 무의식중에 "원불교 선생들 다 도둑놈이야" 하고 터져나왔다. 너무나 기가 막히고 화난 나머지 지른 소리였다. 정신이 들고보니 어디가서 빠져죽고 싶었다.

이튿날 총부 조회에서 그 소식을 들은 어른들에게 한참을 꾸중들어야 했다. 나중에 자초지종을 안 이완철 교정원장이 "이번 일로 이참에 너를 공비생으로 공부시켜준다고 한다. 가지 말아라"고 말렸지만, 그는 근무지로 떠났다.

막막했지만 또 재밌어
그의 두 번째 간사근무지였던 통영교당에서도 박세경 교무의 예쁨을 받으며 재미있게 살다보니 4년이 지났다. 그리고 영산선원 2년, 동산선원 2년 수학하고 몸이 안좋아 1년 휴무하는 동안 박세경 교무가 서면교당으로 발령나자 그를 부교무로 불러 1년을 같이 살다가 원기59년 다대교당으로 단독 발령받는다.

당시 다른 교당들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서면교당에 살면서도 부산교당에서 걷어다 준 돈으로 살아봤기에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참 막막했다. 쌀 한말 정도 든 항아리의 쌀이 다 떨어져도 교도들에게 쌀 없다는 소리 못했다. 나중에 주무가 그 사실을 알고 쌀을 사다 줬다. 그저 교무니까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보다 하며 살았다. 7~8명 나오는 교도들과 법회보며 교화하는 재미로 살다보니 학생법회, 청년법회, 어린이법회까지 생겼다.

어린이법회는 청년들이 진행하게 했다. 교도들과 시화전한다며 일을 꾸며도 재밌었고, 학생들이 음식 가져다 먹고는 안 먹었다고 발뺌해도 그저 예쁘게만 보였다.

다대교당에서 박희성 교도와 함께.
보성교당 교도들과 영산성지 방문 기념사진.

다대·보성교당 신축하다
그러다가 서면교당에서 같이 부교무로 근무했던 이효원 교무가 양정교당에 살고 있었는데 사정이 다대교당보다 딱했다. 교도집 2층에 세를 들어 시작했는데 교도 조카 때문에 힘들어했다.
"양정교무가 그래. '언니 계(契) 하나만 넣어주소. 교도 조카가 자기 이모집 뺏는가하고 쳐다보고 눈치주는데 무서워죽겠어. 계라도 해서 오두막 하나라도 마련해 나가게 도와줘' 그런 거야."

양정교당 사는 것이 참 딱했지만 다대교당도 형편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한달에 1만원 나오기도 어려운데 1만원 계를 넣어달라고 하니 고민이었다. 그래서 당시 젊은 주무였던 박희성 교도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니 "교무님 제가 1만원씩 드릴께 넣으세요"하는 것이다.

덕분에 목돈을 타게 됐고, 이효원 교무가 "이렇게 우리집도 생겼으니까 거기도 계 넣어서 새로 지어"라고 했다. 그렇게 돈 모으는 법을 알고나니 용기가 생겼다. 당시 은행이자가 백만원에 30만원 할 때였다. 계를 가장 먼저 받아 은행에 넣고 이자로 계를 냈다. 어느 정도 돈이 모아지니 교당을 새로 지을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여기에 교도들 성금과 박희성 교도의 천만원 희사를 보태고, 교회, 성당 가릴 것 없이 가가호호 돌아다니며 희사금을 받아 교당을 지었다. 나중에 워낙 교화가 잘되다 보니 교회에서 학생들 뺏으러 오기도 했다.

원기68년 발령받은 보성교당은 다대교당보다 더 어려웠다. 가서보니 식당방에는 기와가 쏟아져 있었고, 비오는 날 방에서 자면 비가 떨어졌다. 집은 옮겨도 재주는 변함없다고 여기서도 재밌게 살았다. 참기름장사, 모시장사 하면서 모은 돈을 은행에 꼬박꼬박 넣었다. 그렇게 순박하고 좋은 교도들을 교화하며 알뜰살뜰 살면서 빚없이 보성에도 멋진 교당을 신축했다.

이후 원기81년 함안교당, 원기85년 남산교당을 끝으로 원기91년 현장에서 퇴임한다.

천상락의 비결
"나이가 들수록 후진들이 소중하고 귀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데 후진들이 우리처럼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애. 대종사님 법만이 나를 영원히 행복하게 해줄 수 있고, 영원히 부유한 마음을 갖게 해줄 수 있어. 그러면 진짜 나같이 행복한 사람이 이 세상 없다."

그가 평생 가지고 살았던 천상락의 비결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어디서든지 재밌게 살 수 있었던 비법 말이다.

[2018년 4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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