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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근 덕무 교화자의 삶 2. 열심히 일만 하고 살았다
장영근 덕무 교화자의 삶 2. 열심히 일만 하고 살았다
  • 장영근 덕무
  • 승인 2018.04.19
  • 호수 188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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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할 당시에는 교무품과 구별이 따로 없어
힘들고 용금 적었지만 '이 길이 내 길이구나' 생각

[원불교신문=장영근 덕무]영모묘원 초창기에는 늘 바쁜 나날이었다. 따로 법문을 듣거나 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새벽부터 움직이기 시작하면 저녁 늦게쯤이나 끝나는 일과가 365일이었다. 그 흔한 추석·설 명절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백철 원장이 원평에 가자고 해서 따라 나선 적이 있었다. 당시 대산종법사가 원평에 내려와 요양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대산종법사는 교도나 교무를 막론하고 칭찬을 참 많이 해주었다. 나에게 "이런 전무출신이 없다"시며, "전무출신이 아님에도 이렇게 보은봉공 잘한다"고 칭찬했다. 그러면서 "전무출신 하면 더 잘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 말씀이 씨앗이 되어 출가를 한 것 같다.

원기71년에 신제근 교무가 영모묘원 원장으로 왔다. 이백철 원장을 1년 동안 모셨는데, 본격적인 영모묘원 가꾸기는 이때부터 시작했다. 시간 앞에 장사 없는 것 같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다람쥐 쳇바퀴 돌듯 변함없이 매일 그 일이 그 일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들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일할 때 옆에서 안 건드리면 참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데 어쩌다 법 높은 분들이 윽박지를 때가 있다. 그러면 '내가 여기에 뭣하러 일하러 왔는가' 하고 생각이 들기도 했다. 

때로는 나도 분에 못 이겨 한두 번 던지고 나오기도 했다. 그러면 김태성 교무가 나를 데리러 오곤 했다. 또 마음이 약해져서 따라 들어갔다. 사실 나도 스트레스가 쌓여 막상 일을 벌려 버렸지만, 그러고 나면 마음이 많이 약해져 있었던 것도 있었다.

지금은 영모묘원에 입묘할 자리가 없을 정도지만, 당시에는 빨리 파는 것이 중요했다. 돈이 그만큼 없었고 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묘 5개를 사면 1개를 덤으로 주었다.

출가는 이때 하게 됐다. 신제근 원장이 추천인으로 김태성 교무가 보증인이 됐다. 그때 강보광, 고도길 동지들이 모두 원기79년 출가 동창들이다. 당시에는 품과가 따로 없었고, 봉공직 신청을 받을 때였다. 당시 30여 명 정도가 한꺼번에 신청했을 정도로 신청자가 많았다. 그런데 이때 봉공직을 서원한 이들이 많게 되니까 총부에서는 무슨 조건을 만들어야겠다고 해서 도무품과, 덕무품과를 만들었던 것 같다. 

당시 호칭이 나눠 있지 않고 교무나 봉공직을 서원한 이들이나 똑같이 불렀다. 그러다가 사람이 많아지니까 덕무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때는 1주일 교육이나 공부도 없었다. 그냥 서류로만 신청받고 바로 전무출신을 냈다.

나는 이 길이 내 인생길이구나 싶었다. 물론 적게 받는 용금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인연이다 싶었다. 또 한편으로는 전무출신하라는 어르신의 말씀도 땅에 떨어뜨리기에는 마음이 걸렸다. 그동안 열심히 생활한 나에게 어르신들은 많은 믿음을 보여줬기 때문에 외면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영모묘원에서 22년이나 근무했다. 처음 들어갈 때부터 나올 때까지 일만 하고 산 것 같다. 잔디 깎고 풀 깍고, 동네주민들 매일 100여 명 인부들을 태우러 다녔다. 

전무출신하고서 다른 생각은 없었다. 오로지 일만 하고 살았는데 햇빛 아래서 일만 하니까 하도 까매서 왜 전무출신들은 다 까맣냐 하는 소리도 들었다. 그렇게 인부들과 늘상 땀 흘려 일만하다 보니 정복도 딱히 입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인부들도 100명에서 80명으로, 다시 60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다보니 여산, 왕궁, 봉동읍 제내리 등 인부를 구하러 안 다닌 곳이 없었다. 인근마을 주민들은 나이가 들어서 더 이상 힘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인부로 온 할머니들이 연세가 많아서 언덕의 잔디를 메다가 미끌어져 떨어지기도 했다. 안 되겠다 싶었다. 비탈진 곳에서 잔디를 깔고 풀 메는 일이 위험했기 때문에 잔디 대신 철쭉을 심자고 원장에게 말했다. 지금 조성해 놓은 철쭉은 인부들 안전 때문에 잔디에서 바뀐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원장님도 잔디를 고집했지만 한번 철쭉을 심어놓고 보니 보기에도 괜찮고 그래서 언덕마다 모두 철쭉을 심었다. 하지만 이것도 몇 년이나 걸린 작업이었다.

/동산원로수도원

[2018년 4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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