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혜성 교무] "이 업무만 빨리 처리해 놓고, 벚꽃 보러 가야지! 오늘은 너무 바쁜 날이니까 내일은 꼭 벚꽃 길 산책해야지. 이러다가 벚꽃 다 지겠네." 다짐하고, 다짐만 한다. 어디 먼 곳의 벚꽃구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근무하는 중앙중도훈련원 진입로에는 지금, 벚꽃이 손만 대면 우수수 떨어질 만큼 흐드러져 있다. 현관을 벗어나 50걸음만 걸으면 된다. 찬란한 벚꽃길이 자태를 드러낸다. 이 벚꽃 길이 예뻐서, 특별한 시간을 내 구경 오는 사람들도 있다. 

코앞의 벚꽃 길 산책이 뭐가 그리 어렵냐고? 무심한 하늘의 장난일까. 벚꽃이 만발하는 이 날들, 훈련원은 연달아 훈련이 진행 중이라 매우 바쁘다. 그러니, "벚꽃아, 지지마라! 내가 일이 다 끝날 때까지 조금만 버텨라!" 벚꽃이 져버릴까 걱정하고 안타까워 하면서도 나가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 날들 중 어느 오후, 청천병력같은 비 소식이 들린다. 큰일이다. 벚꽃 길 산책을 아직 못했다. 비가 내리면 벚꽃들이 내 간절한 응원에도 불구하고 몸을 땅바닥으로 미련없이 던져버릴 것만 같다. "나가봐야겠다, 아.. 아직 해야 할 일이 있는데" 해야 할 일 생각에 또 지금은 나갈 수 없다. "벚꽃은 내년에도 피니까 내년에 보면 되지. 그래, 앉은 자리가 꽃자리인데, 굳이 다른 꽃을 보러 갈 필요가 있을까? 아니, 지금 이 순간 꽃 본 마음과 둘이 아니면 되는 건데 꽃길을 꼭 걸어야 하나" 생각의 흐름 속에 꽃이 별거 아닌 것이 되자, 꽃길을 걸을 마음도 냉큼 사라진다. 꽃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니, 문득 타인이 나를 보듯 '객관화'가 된다. 

나는 나에게 묻는다. "그런데 넌 대체 뭐가 그렇게 바쁘니?"라고. 30분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단 10분만 시간을 내면 된다. 내게는 그 10분이 정말 없어서, 며칠째 "꽃아 지지마라 조금만 버텨라"를 말하는 것인가? 생각해보면 시간이 없음이 아니라 마음에 여백이 없는 것이다. 바쁘다는 생각에 마냥 속아서, 바쁘다 바쁘다를 연발하고 다닐 뿐이다. '일이 있을 때는 일 없을 때의 심경'을 가지라 했는데,  '일이 있는 심경'에 매몰돼 있으니 꽃 한번 보러 나갈 여유도 없는 것이 아닌가. 

대산종사는 "해탈은 여유 있는 마음으로 살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처사하는 것이니, 곧 죽을 줄 알면서도 아무 일 없는 마음으로 여유 있게 일을 처리하는 심경을 말함이라, 대종사께서는 일제 강점기에 감시하러 파견 나온 일경을 알뜰히 챙기셨고, 예수께서는 자기 제자 중에 당신을 부정할 제자가 있음을 미리 알았으나 더욱 아끼고 사랑하며 중책을 맡기셨나니, 이것이 여유 있는 마음이요 해탈이니라"고 법문했다. (〈대산종사법어〉 운심편 21장)  

곧 죽음에 임박하는 그 찰나에도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내 눈 앞의 말간 새싹에 온 마음을 줄 수 있는 여유, 그런 멈춤 그런 심력, 생각만 해도 마음이 넉넉해진다. 몸에는 일이 있어도 마음에는 일이 없다. 

여유 있는 마음이 곧 해탈이라 했다. 처음부터 꽃이 중요한 건 물론 아니었다. 다만 이 꽃이 내 마음의 여유 없음을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으니, 꽃을 보는 것도 사실 중요하다. 지금 볼 꽃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 

/중앙중도훈련원

[2018년 4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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