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지은 교무] 일경 한 사람이 대종사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에 분개한 오창건이 무례함을 꾸짖어 보냈다. 그러나 대종사는 "그 사람이 나를 아직 잘 알지 못하여 그러하거늘 크게 탓할 것이 무엇이리요"라고 한다.

얼마 전 원다르마센터에서 기금 마련 콘서트를 열었다. 네 명의 클래식 연주자들로 이루어진 앙상블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선율에 취해 있던 중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한 연주자가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불단에 걸터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그 연주자의 상식 없음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몰라도 그렇지, 딱 보면 법당 중앙에 모셔놓은 일원상이며 향로들을 볼 때, 뭔가 신성한 곳이라는 생각이 안 들까?"  그러나 이 실시품 법문을 읽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렇지. 그 연주자가 몰라서 그랬겠지. 몰라서 그런 것을 내 좁은 마음으로 탓하였구나" 하고 오히려 반성이 된다. 

대종사는 사람을 교화하는 사람은 항상 심복(心服)으로 저 편을 감화시키는 데 힘써야 한다고 한다. 심복이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서, 기쁜 마음으로, 성심으로 순종한다는 뜻이다. 오창건에게 무안을 당하여 쫓겨난 일경이 그 일로 인하여 자신의 무례함을 뉘우쳐 '심복'했을 것 같지는 않다. 괘씸해하며 '두고 보자' 하고 돌아갔다면 모를까.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이기려고만 한다. "잘못한 건 너야. 인정해! 내 말 들어!" 하면서 말이다. 어리석은 자는 상대의 마지못해 하는 굴복에 만족해할지 모르나, 상대방이 아무리 미안하다,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어찌 이긴 것이라 하겠는가. 아무리 내가 옳은 경우에도 부드럽고 겸손하게 대해 보자.

그러면 상대도 부드럽고 겸손하게 대응해 올 것이다. 우리는 상대의 언사와 카리스마보다는, 상대편이 나를 존중하며, 내 말을 듣고 있고, 이해해주고 있음을 느낄 때 마음이 움직인다. 대종사는 이기지 아니할 자리에 이기면 반드시 지게 된다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질 자리에서는 질 줄 알아야 한다. 질 줄 안다는 말은, 잘못을 깨끗이 인정하고, 나아가서 잘못한 점, 부족한 점의 개선을 위해 노력까지 할 줄 안다는 것이다. 간혹 연예인이나 정치인, 기업가들의 사과문을 언론을 통해 접하게 된다. 어떤 사과문은 읽으면서 마음이 누그러지고 오히려 그 사과문을 쓴 이에게 호감마저 들게 하는 반면, 읽으면서 어쩐지 찝찝한 기분이 들게 하는 사과문도 있다.

'본의 아니게', '오해', '그럴 뜻은 없었지만', '나도 피해자',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등 합리화와 변명으로 일관한, '이름만 사과문'이 그렇다. 그런 사과문이라면 차라리 안 내는 것이 낫다. 잘못을 깨끗하게 인정하는 사람은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 그러므로 대종사는 질 자리에 질 줄 알면 반드시 이길 날이 온다고 하였다.

여기서 이긴다는 말은 상대를 굴복시킨다는 상대적인 의미라기보다는 약자가 강자가 된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내가 항상 옳을 필요도, 항상 이길 필요도 없다. 질 자리에 질줄 알고, 이기지 아니할 자리에는 물러설 줄 아는 사람, 참으로 멋지지 않은가.

/미주총부법인

[2018년 4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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