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지은 교무] 원각성존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은 1916년, 한국은 일제의 강점하에 있었다. 일제의 감시가 서슬퍼렇던 원기24년 당시 진안교당 교무로 재직하던 구산 송벽조(정산종사 부친) 대희사가 일황에게 "가뭄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조선총독이 물러나라"고 편지를 보낸 사건이 일어났다. 무기명으로 투서를 했지만, 결국 체포돼 1년간의 옥고를 겪었다.

이 사건으로 대종사를 하루 동안 심문한 일경은 '앞으로는 그런 제자가 다시 없도록 서약하라'고 했다. 그러나 대종사는 '노력은 하겠지만, 다시는 없게 하겠다고 하기는 어렵다'고 말하며 끝까지 버티었다. 부모가 자식을 좋게 하려고 하나 자식도 마음대로 못하듯, 내 제자라 하여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함으로써, 정면으로 맞서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순응하지도 않는 수를 썼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저 도장 한번 찍으면 될 것을 대종사는 하지 않았다. 

대종사는 일경의 매서운 감시와 의심을 따돌리기 위해서 '농판' 행세를 했다. '농판'이란 바보를 뜻하는 전라도 방언이다. 일제는 조선 불교를 천황에 대한 충성의 도구로 삼고자 황도불교화(皇道佛敎化) 하려고 했다. 하루는 일본 관헌이 총부에 와서 대종사에게 조선불교를 통합하는 일을 맡아달라고 하자 "지가 뭣을 압니까. 백성은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따라야죠"하며 세 번 같은 말을 하고 세 번 절을 했다. 그러자 그는 말도 잘 못 알아듣는 멀쩡한 시골 바보라고 생각하고 돌아가 버렸다. 

일경이 불법연구회에서 가르치는 사은 중 황은(皇恩)이 없음을 지적하며 시정을 요구하자 대종사는 "사은을 고칠 수는 없고 황은과 불은(佛恩)의 양 대은(大恩)을 위에 넣겠다"고 해 이들을 한때 교리도에 삽입해 편찬했다. 덕분에 사은의 용어는 수정하지 않고 위기를 모면했으니, 얼핏 그들의 말을 수용하는 듯하여 상대를 만족시키면서 슬쩍 피해 돌아가는 묘수였다. 

〈정전〉을 일본어로 발간하면 허가를 내주겠다는 일제의 회유에 대해서는 "〈정전〉을 일본어로 하면 불쏘시개가 되고 만다. 무슨 방편을 써서라도 한문으로 토를 날고 한글로 인쇄하라"고 해서 끝내 거부하다가 마침내 당시 불교 시보사 사장인 김태흡 스님의 도움으로 '불교정전'이라는 제목으로 출판 허가를 받았다. 일본을 참배하라고 하는 요구에 대해서도 마치 갈 것처럼 하다가 마지막 순간에는 안질에 걸렸다는 이유로 피해갔다. 대종사는 이런 식으로 가까스로 불법 연구회를 지킬 수 있었다.

대산종사는 "대도인은 열 사람 중 8~9명은 숨기므로 농판 같아 도저히 알아 볼 수 없어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보통 사람은 도인이 두 수만 높이 점 놓아도 다 도인이 아니라고 의심해 떨어져간다는 것이다. 일제에게 농판행세를 하던 대종사가 왜 하루 종일 취조 받으면서도 끝끝내 서약을 거부했는지, 감히 필자가 그 수를 해석하는 것이 외람된 일인 듯하다. 이미 다가올 세상을 내다보고 둔 수가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

'나'가 가장 중요한 것인 양 살아가는 내가 이 회상의 천하농판이 될 수 있을까? '농판' 행세를 한 대종사의 심법을 나도 흉내라도 낼 수 있을까 자문해본다.  

/미주총부법인

[2018년 4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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