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혜성 교무] 서울에 가는 기차를 탔을 때 내 옆에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이 앉는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차창 밖에 시선을 고정하며 가고 있는데 옆 자리에서 나를 부르는 기척이 느껴진다. 옆을 보니 아주머니가 빵을 먹겠냐고 권한다. 난 어릴 때부터 모르는 사람이 주는 것은 먹지 말라고 배웠다.

내가 비록 생김새는 익산사람 같아도, 차가운 도시녀, 서울사람 아니던가. 괜찮다고 맛있게 드시라고, 사양하고 다시 창밖을 보는데, 또 말을 건다. '이어폰을 끼고 있으니 그냥 안 들리는 척할까?'

창밖을 바라보며 기차를 타고, 음악을 들으며 가는 시간은 내가 참 좋아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을 다른 이에게 방해받고 싶지 않다. 내가 살갑게 응대하면 말을 자꾸 시킬 것만 같다. 상상만 해도 피곤한 일이다. 정복을 입고 있는 상태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한 시간 넘게 질문공세를 받아야 하는 일은 더욱 그렇다. 

아주머니의 말이 안 들리는 척 하려는데, 그건 왠지 양심이 허락지 않아 다시 이어폰을 빼고 아주머니를 바라본다. 이번에는 음료를 권한다. "안 먹는다구요!"라고 할 수가 없어서 일단 감사하다고 말하고 음료수를 받는 내 마음에 경계심이 가득하다. '받긴 했지만 먹지는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다시 창밖을 응시한다. 난 간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이 주는 음식을 먹는 것 또한 꺼림직하다. 또 말을 시킬 수도 있으니, 그냥 눈을 감고 가야겠다 싶어서 음악소리를 키우고 눈을 감는다. 

눈을 감고 가만히 있다 보니, 경계심만 가득한 내 마음이 바라봐진다. "난 왜 호의를 호의로 생각하지 못하고 귀찮다고 생각할까. 난 왜 내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고만 생각할까. 옆의 아주머니가 우리 교당의 교도였다면 내가 그랬을까. 아주머니가 우리 엄마라면 내가 그랬을까. 아주머니가 내 마음에 부처였다면 내가 그랬을까. 옆의 그 아주머니는 교화 대상일 수 있다. 또 누군가의 엄마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옆의 아주머니는 부처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 세상에 크고 작은 산이 많이 있으나 그 중에 가장 크고 깊고 나무가 많은 산에 수많은 짐승이 의지하고 살며, 크고 작은 냇물이 곳곳마다 흐르나 그 중에 가장 넓고 깊은 바다에 수많은 고기가 의지하고 사는 것 같이, 여러 사람이 다 각각 세상을 지도한다고 하나 그 중에 가장 덕이 많고 자비(慈悲)가 너른 인물이라야 수많은 중생이 몸과 마음을 의지하여 다 같이 안락한 생활을 하게 되나니라"고 법문했다. (〈대종경〉 불지품 1장) 

가장 깊은 산이라야 많은 짐승이 의지하고 살 수 있는데, 내가 가진 산은 뭐 이렇게 나 한 사람 밖에 못 살만큼 좁은 것일까. 너른 세상의 많은 생령들을 위해 출가를 했다고 말만 하는 나는, 모르는 아주머니의 호의를 받아들일 만한 마음크기도 안 된다는 말인가. 마음이 아리고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느닷없이 기차 안에서 아주머니의 권유를 통해 나의 서원을 되돌아본다. 물론, 아주머니는 그 뒤에도 또 내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난 내 옆자리에 앉은 부처님과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서울로 올라온다. 마음을 한번 돌렸을 뿐이다. 

/중앙중도훈련원

[2018년 4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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