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지은 교무] 일본 선 불교가 운영하는 선훈련센터에서 2박3일간의 훈련을 참석한 적이 있었다. 점심식사 시간에 뉴욕에서 왔다는 미국 청년과 대화를 나누던 중 나를 원불교 성직자라고 소개하자 나에게 '깨달음'을 믿느냐고 물었다.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는 그는 불교의 깨달음이란 것의 실체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듯 했다. 맞은편에 앉은 눈 푸른 스님은 '만일 내가 그것을 믿지 않았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년은 다시 나에게 "깨달은 사람을 본 적이 있느냐"고 진지하게 물었다. 나는 깨달은 사람만이 깨달은 사람을 알아 볼 수 있다는 대종사의 말씀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견성성불'이라는 말이 있다. 견성을 하면 성불을 한다는 뜻일까? 이에 소태산 대종사는 "과거에는 인지가 어두운 고로 견성만 하면 곧 도인이라 했지만, 돌아오는 세상에는 견성만으로는 도인이라 할 수 없을 것이며, 대개의 수도인들은 견성은 일찍이 가정에서 쉽게 마치고, 성불을 하기 위해 큰 스승을 찾아다니며 공을 들일 것"(〈대종경〉성리품 23장)이라 했다.  

견성의 목적은 성품의 본래 자리를 알아 잘 사용하자는 것인데, 만일 견성만 하고 성불하는 데에 공을 들이지 않으면 보기 좋은 납도끼 같이 아무 소용이 없다고도 말했다. 이렇게 견성과 성불의 관계를 명쾌하게 밝혀줬다.  

어느 날 대종사를 찾아온 방문객이 당돌하게도 면전에서 "선생께서는 참으로 견성하셨습니까" 하고 묻는다. 마치 깨달음을 믿느냐고 묻는 뉴요커 청년처럼 그 역시 견성이 곧 성불이라 믿었을 것이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도를 구하는 이들이 요원하게 생각하는 견성, 혹은 깨달음. 원불교는 전통불교와 다소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 

대종사는 종교의 문에 성리를 밝힌 바가 없으면 원만한 도가 아니라 했다. 견성은 종교의 생명력이라고도 할 것이다. 그러기에 전 교단이 교단 백주년 대적공실 의두요목을 연마해 의단을 뭉치지 않았던가. 그러나 견성이 곧 성불이라 해견성을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독공하는 것은 잘못된 방향일 뿐 아니라 수행상 반드시 피해야 하는 금기이다. 

대종사는 도를 깨치는 것을 염소 키우는 것에 비유했다. 염소를 키울 때 무엇을 한꺼번에 많이 먹여서 일시에 키우는 것이 아니라, 키우는 절차와 먹이는 정도만 고르게 하면 자연히 큰 염소로 자라듯, 도가에서 도를 깨치는 것도 이와 같다는 것이다. 삼학을 고루 대중 잡고, 상시훈련법을 통하여 일과로 득력하고, 정기훈련법대로 끊임없이 닦아가다 보면, 도라는 것은 자연히 얻어지는 것이다.

사실 깨달은 이를 본 적이 있느냐는 청년의 질문에, 내 머릿속에는 원불교 교무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묵묵히 소임을 다하고, 담박한 생활을 하며, 실생활에서 대의에 맞게 취사하는 교무를 만나면, 이 법이 가진 힘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그 모습이야말로 원불교가 추구하는 도인이며, 깨친 이의 모습 아닐까. '이러한 시대야말로 견성도인이 많아야 할 것 아닌가?'라는 말씀처럼, 우리 교단 구석구석에는 이같은 숨은 도인이 많으리라고 확신한다. 도덕의 참다운 가치는 후대사람들이 증명할 것이다. 

/미주총부법인

[2018년 5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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