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혜성 교무] 우리 어머니는 늘 "나는 너희들을 키워본 적이 없어. 다 알아서 컸지. 그게 늘 미안해"라고 말했다. 어머니의 이 말을 의심해 본 적이 한번도 없다.

우리집은 가정형편이 그다지 넉넉지 않았다. 철들고 나선, 부모님에게 돈 달라고 하는 일이 내겐 늘 꺼려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여동생과 내가 구김살 없이 잘 자란 것도 사실이다. 이 정도 형편에, 이 정도 잘 자라준 우리가 대견하다고 해야 할까. 그러니 어머니가 "우리를 키워본 적 없다" 하실 때마다, 나는 맞장구를 치며 '자유방임으로 강하게 키운 어머니의 담대한 심력'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다.

밥 먹지 않겠다고 투정하면, 밥을 달라고 사정할 때까지 밥을 주지 않는 대쪽 같던 우리 어머니 아닌가! 자존심이 센 나도, 몇 끼를 굶고는 결국 밥 달라고 사정을 했던 기억이 있다. 이렇듯 논조가 '자유방임'이시니, 난 당연히 우리가 알아서 컸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알았다. 이제 할머니가 된, 우리 어머니를 보면서 알게 됐다. 어머니는 동생을 대신해 손주를 돌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손주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라는 게, 관찰자가 잠시라도 눈을 떼는 순간 '우르르 쾅쾅' 넘어지고 다치고 울고 난리도 아니다. 걸음걸음 사고만 치는 조카가 난 귀찮기만 한데, 어머니는 귀찮아하지 않았다. 마냥 대견하단다. 잠시도 아이에게서 눈을 못 떼는 어머니를 보며 알았다. 아이는 절대로 알아서 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삶의 중심'을 아이에게만 두고, 끊임없이 지켜보고 살펴야만 했다. 사랑이 아니면 키워 낼 수가 없다. 

그런데 어머니는 대체 뭐가 그렇게 미안한 걸까? 이 의문은 이제 엄마가 된, 동생과 전화통화를 하다가 풀린다.

아이가 이유 모를 열에 시달려 병원에서 온갖 검사를 받고 있을 때였다. 동생은 수화기 너머 울먹이고 있다. "언니! 나 어떻게 해. 아이가 너무 아파. 이렇게 아픈 이유가 다 나 때문인 것 같아. 아기한테 미안해서 어떻게 해" 펑펑 우는 동생의 말을 들으며, 난 동생의 논리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배울 만큼 배운 멀쩡한 내 동생이 왜 저렇게 말도 안 되는 말을 할까. 애가 아픈 게, 왜 자기 때문이지? 원인은 아직 병원에서도 모른다는데? 세상의 모든 부모는 같구나.'

단지, 부모는 부모이기에 자식에게 한없이 미안한 것이었다. 어머니가 '너희들이 다 알아서 컸다'라는 말도 전혀 사실이 아니었고, '미안하다'고 했던 말 역시 다만 어머니라서, 그러했던 것이다. 

정산종사는 "상(相)에 주착한 공덕은 오히려 죄해의 근원이 되기 쉽나니, 사람이 다 자식을 기르되 부모에게는 상이 없으므로 큰 은혜가 되듯 복을 짓되 상이 없어야 큰 공덕이 되나니라"고 말했다. (〈정산종사법어〉 무본편 34장) 

상이 없는 공덕을 말씀하며 부모의 예를 든 것이다. 부모는 진정 길러줬다는 상이 없다. 상이 없고 사랑이 깊으니 되려, 미안해지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가보다. 상이 없으므로 큰 은혜가 되는 부모의 사랑, 어머니가 늘 하던 말씀을 통해 오늘도 나는 가늠하기도 어려운 '참 사랑'을 배운다. 

/중앙중도훈련원

[2018년 5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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