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나의 외국생활 도왔던 할머니 은혜 떠올라
원광디지털대학교 한국어문화학과 입학하다

[원불교신문=김기원 교무] 나는 직장 정년퇴임을 하면서 제2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고심했다.

남은 인생 30년을 위해 길을 찾다보니 어른들의 퇴임 후 만족도 조사에서 종교생활과 봉사활동이 만족도가 제일 높은 것을 보면서, 나도 동감하고 이와 같이 살아가리라 결심해 그렇게 살아 봤다. 하지만 나에게 만족을 주는 봉사활동들은 노동을 하는 허드렛일보다는 전문성을 필요로 했다. 

나는 사회봉사와 거리가 있는 특수 기술 분야의 경험자로 그 경험은 봉사활동에 소요가 없으므로 사회봉사를 위해(퇴직 후) 사회복지학 전문학교 과정을 마치고 사회복지사2급 자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봉사의 바탕이 될 뿐 나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종교생활도 남들과 같이 교리를 알아야 했기에 원광디지털대학교 원불교학과에 입학해 교육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흐르던 여름날의 길거리는 한산했다. 길가는 사람들 중에 어색한 복장이 눈길을 끌었다. 정장에 넥타이를 맨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이들을 귀족의 자녀라 했다. 품위유지를 위해 더운 날씨에도 반듯한 정장차림으로 다닌다고 했다. 더구나 그 중에는 왕족도 있다고 한다.

외국어대의 외국인 기숙사를 중심으로 봉사활동과 종교생활을 하다보면 외국인 대학생들에게 원불교의 교리가 전달되고 그 기운으로 원불교에 입교하게 돼서 자연스러운 교화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왕족이나 귀족 그리고 국가의 지도층 인사가 교도가 돼서 원불교를 전파하게 된다면 발전 속도가 매우 빠를 것이고, 그 왕족이 왕이 된다면 그 나라의 국교로 원불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에게 주는 계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낯선 한국땅에서 언어도 서투르고 문화도 익숙치 않은 외국인 청년들을 한번씩 마주칠 때면 왠지 나의 37년 전 모습이 떠올랐다.

미국에 머물 때 피부색이 다른 나는 업무상 정장을 입었고 더운 여름날 가끔 이렇게 어색하게 길을 걸었다. 그때를 기억하며 그 시절의 생각에 머문다. 한국인이 없는 그곳에서 나는 자원봉사자 할머니의 도움을 받았다. 집으로 찾아와서 영어도 가르쳐주고, 시장도 함께 가주고, 미국생활을 가르쳐줘서 일상을 편안하게 해줬다. 교사 정년퇴임 후 봉사활동을 하면서 살아가던 70대 후반의 할머니는 나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아있다. 

내가 받은 은혜를 베풀어서 나도 그 할머니처럼 외국인에게 한국어도 가르치고, 시장에도 같이 다니면서 생활의 불편을 덜어준다면 한국에 거주하는 젊은 외국인 학생들이 한국생활에 더욱 편안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또 한국을 사랑하고, 나와도 친구가 되서, 서서히 원불교에 입교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해본다. 그리고 본국에 돌아가서 살아가는 동안 나처럼 좋은 생각으로 한국을 기억하리라고 미뤄 짐작도 해본다.

그래서 나는 과거 은혜받았던 고마운 추억을 다시 갚겠다는 마음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원광디지털대 한국어문화학과 복수전공을 등록했다. 미국의 그 자원봉사자 할머니처럼 외국인 학생들에게 좋은 할아버지로 기억됐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한국어교사2급 자격을 획득해 전문성을 가지고 외국인 학생에게 봉사하면서 그들에게 도움주는 좋은 할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친분 있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모 교수에게 뜻을 전하니 학교에서 꼭 필요로 하는 봉사라며 좋아하고 적극적으로 도움주겠다는 격려까지 얻어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지금 회상해보니 내가 어려울 때 받았던 은혜를 갚아보겠다는 마음과 은퇴 후 제2인생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신중히 고민했던 내용들이 모아져 오늘날 기간제 전무출신으로 연결되었지 않았나라는 감회가 든다. 정말 세상에는 그냥 되는 일은 없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은 만덕산훈련원에서 매일 성지의 기운을 받으며 기도와 선, 재가교도들의 훈련을 돕고 있다. 이렇게 출가하기까지 만났던 인연들의 소중한 은혜의 소치라 여기며 오늘도 감사를 올린다.

/만덕산훈련원

[2018년 5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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