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강(講)은 예전에는 불전을 강독하는 모임을 칭했다. 경을 대상으로 하는 강경, 율장을 대상으로 하는 강률, 논서를 대상으로 하는 강론이 있다.

〈법화경〉을 주제로 하면 법화강(한국에서는 산림, 즉 법화산림), 〈화엄경〉을 주제로 하면 화엄강, 열반을 주제로 하면 열반강이라고 한다. 불교개설서에 해당하는 중국의 〈석씨요람〉에는 3세기 위(魏)나라의 주사행(朱士行)이 〈도행반야경〉을 설한 것을 강경의 시초로 보고 있다. 

이름은 다소 달라도 동아시아에서는 이러한 강이 발전해 신앙조직, 결사조직, 순례조직, 경제조직, 직업조직이 됐다. 진리의 언어인 경전을 떠받드는 모임이 다양한 삶의 형태로 발전된 것이다. 강의 역사는 무명에서 벗어나 정신적으로 진보하기 위한 인류의 부단한 노력을 보여준다. 

강의 전통을 계승한 강연은 격식을 통해 사리 문제를 해석하고, 그 내용을 교환해 혜두를 단련시키는 과정이다. 원불교에서 경은 경률론만이 아니라 진리를 밝힌 모든 성경현전을 통틀어서 지칭한다. 경강의 목표는 지혜로써 삶의 어둠을 밝히는 것에 있다.

강연은 일과 이치로 이루어진 삶에서 발견된 진리를 대중에게 펼쳐 보여주는 일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컨텍스트(context)에서 텍스트(text)를 발견하는 것이다. 즉, 우리 삶(컨텍스트)이 진리(텍스트)에 기반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내가 진리의 뜻, 성현의 깨달음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반추하고 복기하는 일이다. 

회화(會話)는 법담, 법좌, 단회의 근본방식이다. 삶에서 얻은 지혜를 나누어 서로 깨닫는 과정이다. 회화는 우리의 삶을 치유하는 집단 상담이 될 수 있다. 참여자의 기본자세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완전히 긍정하며 경청해야 한다. 지금 나의 시각과는 다를 수 있지만, 그 말이 언젠가는 진실로 판명날 수 있다고 봐야 한다. 

예를 들어 종이컵 하나를 설명한다고 하자. 위아래에서 보면 둥근 모습이다. 옆에서 보면 마름모 사각형이다. 뿐만 아니라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종이컵의 모양은 얼마든지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화자(話者)는 분명 자신이 본 컵을 말하고 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컵을 말하고 있다. 컵을 하나의 모습으로 완전하게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여러 각도에서 본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서 본다면 컵의 전모는 드러날 수 있다. 

회화는 '고뇌하는 삶의 현실에서 어떻게 성경현전의 가치를 발견하고, 마침내 그것을 통해 어떻게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보았는가'라는 것을 고백하는 일이다. 그 말씀은 설한 분의 언어이므로 내 것이 아니다. 그 말씀을 받들어 내가 체험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그 뜻과 일치하고 언어에 힘이 생긴다. 삶이 곧 경전의 해석이 된 것이다. 보보일체대성경(步步一切大聖經)이다.  

강연이 마른 나뭇가지에서 꽃을 피우는 과정이라면, 회화는 그 꽃으로 향기를 나누는 것이다. 강연과 회화의 기본원칙은 신해행증(信解行證)에 기반한 자신의 삶을 고백하는 일이다. 진리와 성현의 말씀을 확실히 믿는 것, 배우고 익히며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을 놓지 않는 것, 몸으로써 실천에 옮기는 것, 그리고 깨달음에 이르도록 부단히 노력해서 증명하는 것이다.

어둠에서 밝음으로 나아간 만큼 진실하고 풍요로운 말이 될 것이다.

/원광대학교

[2018년 5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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