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전에 인식작용을 집중시키는 게 아닌
단전의 기운을 그대로 느끼는 것

좌선은 정신뿐만 아니라 기운도 함께 단련하는 것
…외정정과 내정정 병진해야

적적성성과 원적무별의 진경은 서로 다르지 않아
…방심하면 적적성성 풀어져"

'욕심 담박하고 생각 고상하면 망념 쉬고 맑은 기운 올라'


[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소태산 대종사는 좌선의 방법을 설명하면서 '극히 간단하고 편이하여 아무라도 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가 좌선을 하면서 그렇게 쉽게 느껴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좌선이란 어떤 공부이며, 왜 어렵게 느껴지는지, 또한 일상생활에서 수양의 공부를 어떻게 체를 잡아야 하는지 등의 문제를 가지고 문답했다. 수양과 좌선공부에 대한 주제로 만덕산훈련원 전흥진 교무를 찾았다.

- 좌선은 심성수양을 위한 공부인가
좌선의 요지에 보면 "좌선이라 함은 마음에 있어 망념을 쉬고 진성을 나타내는 공부이며, 몸에 있어 화기를 내리고 수기를 오르게 하는 방법이니 (중략) 정신과 기운이 상쾌하리라"고 말씀했다. 몸과 마음이 한결같다고 표현하며, 몸과 마음을 둘로 보지 않았다. 이어 정신이 상쾌하다 한 것이 아니고 정신과 기운이 상쾌하다고 한 것 역시도 마음과 기운을 같이 강조한 것이다. 

대종사는 망념과 기운의 관계, 마음과 기운의 관계를 보이기 위해, '망념이 쉬면 수기가 오르고, 수기가 오르면 망념이 쉰다'고 설명해 기운하고 연관해 말했다. 내가 실질적으로 수행하면서 느끼는 것은, 좌선에 있어서 심성적인 부분만을 말해서는 부족함이 있고, 정신과 기운의 연계적인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산종사법어〉 원리편 14장에서는 "기(氣)가 영지를 머금고 영지가 기를 머금은지라 기가 곧 영지요 영지가 곧 기"라고 말했다. 마음과 기운은 둘이 아닌 것이다. 천도품 23장을 보면 '하늘 사람은 항시 욕심이 담박하고 생각이 고상하여 맑은 기운이 위로 오르는 사람이요' 라는 말이 있다. 좌선의 요지에서 수(水)기운이 오른다는 것은 여기서 말한 맑은 기운이 위로 오르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욕심이 담박하고 생각이 고상하면 망념이 쉬게 되고 맑은 기운이 오르는 것이다. 수양을 통한 식망현진(息妄顯眞), 수승화강(水昇火降)도 이 같은 것이다. 

- 좌선시 다리가 아프면 잠깐 바꾸는 것도 좋다고 했다. 하지만 좌선시 다리가 아플때마다 바꾸면 몰입이 어렵지 않는가. 자세가 편안해 지기까지 좌선에 익숙한 몸을 만들 필요가 있지 않는가? 좌선을 위한 개인의 적공이 필요하지 않나
일반적으로 조신(調身), 조식(調息), 조심(調心)의 순서를 이야기하는데, 몸을 만든다고 해서 몸이 만들어지고 선이 되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과정을 너무 주장하면 선의 취미를 잃게 하지 않을까 염려스럽기도 하다.

나도 처음에는 좌선을 할 때 다리를 많이 바꾸기도 했는데, 조신 조식 조심이 순서로 가는 느낌보다 상호작용의 느낌이다. 처음 좌선을 시작할 때, 나 역시 허리가 좀 굽고 반듯하지 않았다. 하지만 선을 계속하고 허리를 펼 수 있는 만큼씩 꾸준히 하니 몸이 부드러워지고 알아서 허리가 펴졌다. 안 펴지는 허리를 억지로 펴려고 하면 몸에 이상이 생긴다.

요가의 원리도 몸에 맞게 하는 것이지 억지로 무리하지 않는다. 되는 만큼 꾸준히 하면서 기운이 통하고 하드웨어적인 몸도 갖춰져 간다. 다만 머리와 허리를 곧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게 해야 중추신경계가 바르게 펴지기 때문이다. 중추신경계가 바르게 펴져야 온 몸의 기운이 잘 통할 수 있다.  

- 단전주를 챙기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달라
단전주는 단전에 기운 주해 있는 것만 대중잡으라 했다. 먼저 단전주를 할 때는 몸에 힘을 빼야 한다. 머리와 허리를 곧게 해 중추신경계를 세운 다음, 다른 곳은 힘을 다 빼야 한다. 이렇게 몸의 힘을 빼다보면 몸의 중심이 단전이기 때문에 단전으로 기운이 모인다.  

단전에 기운 주하는 대중이란, 생각과 의식적인 몰입으로, 단전부위에 인식작용을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다. 단전 기운을 단전 그 자체로 알아차리고 느끼는 것이다. 머리의 생각에서 단전으로 마음이 몰입하는 원리가 아니라, 단전기운을 단전에서 마음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는 마음과 기운이 둘이 아닌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마치 손으로 팔을 꼬집을 때 아픔을 머리로 인식해 내는 것이 아니라 팔 자체가 아픔을 느끼듯 단전에서 그렇게 알아차려야 한다.

한 가지 더 설명하자면 우리가 흔히 호흡과 단전주를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대종사는 호흡에 대해서는 좌선의 방법 3조만 밝혀놓았다. 혹자는 단전의 기운 주하는 방법을 호흡으로 하는데, 호흡으로 단전주를 의식하게 되면 기체나 역기와 같이 몸에 탈이 날 수 있다. 호흡은 단전주를 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이지 호흡이 주가 돼 단전을 찾는 것이 아니다. 

- 적적성성(寂寂惺惺)한 때와 원적무별(圓寂無別)의 진경(眞境)은 어떻게 다른가
적적성성과 원적무별은 같은 말이라 생각한다. 단전의 기운을 단전에서 알아차리면 그 상태가 적적성성이고 원적무별한 진경이다. 적적성성과 원적무별이 과정의 차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좌선의 방법 2조가 해결이 되면 6조가 따라온다는 입장이다. 

단전 자체에서 그대로 느껴 알아차리는 마음이 오롯하게 있으면 망상이 없다. 망상이 없는 가운데도 알아차리는 것, 그 자체가 적적성성이다. 그러나 '방심이 되면 그 기운이 풀어지나니'라고 했듯, 오롯함을 유지 못하고 방심이 돼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적적성성이 깨져버리는 것이다. 

원적무별한 진경에 이르면 물아의 구분을 잊고, 시간과 처소를 잊는다 했는데, 이 진경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적적성성의 상태가 100% 꾸준히 이어지지 못하고 방심이 되기 때문이다. 컴퓨터가 속도가 빠른데 창을 여러 개 띄우면 속도가 느려진다. 프로세스 처리 시 라인은 하나인데 왔다 갔다 하면서 이 작업 저 작업을 동시에 수행하려 하니 느려지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 프로세서도 하나이기 때문에, 여러 망상에 끌리지 않고 단전에 기운 주해있는 것만 오롯이 대중잡아 가면 그것이 적적성성 혹은 원적무별의 진경이 계속되는 것이다.

- 수양을 일상생활에서 계속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정신수양의 요지를 보면 '안으로 분별성과 주착심을 없이하며 밖으로 산란하게 하는 경계에 끌리지 아니하여 두렷하고 고요한 정신을 양성'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안으로 분별성, 주착심이 없고, 밖으로 산란한 경계를 멀리하는 것이 정신수양이라는 것. 밖으로 산란한 경계란 간단히 말하면 계문범과를 말한다. 우리가 누구와 심한 다툼을 하면 다음날 좌선시간에 꼭 생각이 나듯, 일상생활에서 범한 계문은 정신을 산란하게 하는 외경이다. 

좌선을 통해서 분별성 주착심을 없이하는 공부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외경으로 인해 정신을 산란하게 하는 마의 근원을 없게 하는 것도 무척 중요하다. 

대종사는 외정정과 내정정 두 가지를 설명하며 '외정정은 동하는 경계를 당할 때에 대의를 세우고 취사를 먼저하며 망령되고 번거한 일을 짓지 아니하는 것으로 정신을 요란하게 하는 마(魔)의 근원을 없이하고, 내정정은 일 없을 때 염불과 좌선 등으로 온전한 근본정신을 양성하는 것인 바, 내와 외를 아울러 진행하라'고 말씀했다.  

외정정은 내정정의 근본이 되고 내정정은 외정정의 근본이 되는 바 동하는 경계를 당할 때  계문을 잘 지켜 망념 되고 번거한 일을 짓지 아니하면 일이 없을 때 하는 염불과 좌선이 잘 되는 것이다. 또한 염불과 좌선을 하여 온전한 근본정신을 양성하면 일이 있을 때 취사가 잘 되는 것이다. 

/만덕산훈련원장

[2018년 5월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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