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의문은 시작된다. 이것은 무엇이며, 저것은 무엇인가. 어릴 때 의문을 어른이 되어서도 간직한 자는 순수한 사람이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많아지는 것이 앎의 역설이다. 알고자 하는 것은 인간만의 특권이다. 안다는 것은 나의 존재 의미와 내가 살아가는 이유와 힘을 얻는 일이다. 의두와 성리는 그 길을 말한다. 누구든 이 깨달음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의두와 성리는 사리연구 과목이다. 의두가 논리적이며 체계적인 분석을 요한다면, 성리는 직관과 통찰을 요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모두 일원상의 진리로 귀결된다. 이를 위해 의두는 대소유무, 시비이해를 아는 것에, 성리는 우주 만유의 본래 이치와 자성의 원리를 해결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예를 들어 하나의 꽃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 꽃이 노란색인 이유는 과학적으로 유전자분석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그 꽃이 꼭 노란색이어야만 할까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 꽃의 심정을 이해하지 않는 한 알 수 없다. 전자가 의두의 시작이라면, 후자는 성리의 시작이다. 

과학·예술·종교·정치·학문·관습 등 모든 범주의 인류 문명은 이러한 의두와 성리의 산물이다. 그 길은 인간의 수만큼이나 다양하다. 즉 같은 세계에 살면서도 인류의 수만큼 그 해석은 다양하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자신의 영역에서 자신의 역사·언어에 따른 문화가 꽃을 피운다. 의두와 성리는 자신이 처한 삶의 의미를 풍요롭게 길어 올리는 방법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거기에는 또한 공통의 이해가 있다. 왜 4계절이 봄·여름·가을·겨울의 순서인가, 조수미의 천상의 목소리는 왜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가, 왜 동일한 시간·동일한 노동인데 임금에는 격차가 있는가. 우리의 반야지(般若智) 혹은 공적영지(空寂靈知)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해석 너머를 통해 영혼의 울림 속에서 펄럭이는 우주적 질서인 진실과 행복, 평화와 낙원의 깃발을 바라본다. 궁극으로 통하는 길에는 세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일원상진리의 본질을 나타내는 하나라는 의미이다. 하나라는 일체성은 만법귀일의 소식, 부모미생전의 본래면목을 포함한 1,700공안만이 아니라 모든 의문의 핵심 밑바탕을 구축하고 있다. 합리적이든 초월적이든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인류의 분열과 갈등의 이유는 하나의 세계에서 일탈했기 때문이다. 너는 나이며, 나는 너다. 타자는 나의 다른 이름이다.

둘째는 일원상진리를 인식하는 방식인 진공묘유의 세계관이다. 진공은 영원한 그 무엇은 없으며, 완전한 무의 세계 속에서 계급과 차별이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근원적으로 평등하며, 자유로운 존재다. 또한 모두는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서로 의지해 있는 사회적 연기의 존재다. 모든 존재는 묘유의 절대적 존재인 동시에 서로가 서로의 기반이 된다. 

셋째는 일원상진리가 우리에게 부여한 은혜의 가치다. 모든 생명은 각자 자신의 일원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우주의 보편적인 리(理)의 세계가 누구에게나 부여되어 있다는 성즉리(性卽理)의 세계관이라고 해도 좋다. 리는 관념이 아닌 서로를 살리는 은혜의 세계를 뜻한다. 의두와 성리는 이 무한 절대의 은혜의 이치를 발견하여 이 땅의 평화와 행복을 구현하기 위한 오래된 길인 것이다.

/원광대학교

[2018년 5월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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