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혜성 교무] 세면장에서 세수 중, 방에서 음악소리가 들린다. 알람이다. 식당에 내려갈 준비를 시작하라는 7시 알람이 울린다. '빨리 꺼야 하는데' 얼굴엔 이미 비누칠이 돼 있다. 난감하다. 비누칠 시작 전에 알람이 울렸으면 냉큼 가서 껐을 텐데. 비누칠을 하는 손길이 빨라진다. "알람을 꺼야 하니, 일단 대충 비누칠을 마치자." 바쁘게 물로 얼굴을 닦아낸다. 귀에 알람소리가 계속 들린다. 늘 울리자마자 꺼서 몰랐는데 알람소리는 생각보다 오랫동안 쉬지도 않고 울렸다. 

"빨리 마치고 알람을 끄자." 급히 비눗물을 닦는 중에 '쨍그랑~' 하는 소리가 난다. "뭐지?" 덜 씻겨진 비눗물에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살펴보니, 급히 움직이느라 양치컵이 손에 닿아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아잇, 마음도 급해 죽겠는데! 왜 컵까지 떨어지고 난리야." 짜증이 올라온다. 손을 휘휘 내저으며 떨어진 양치컵을 바닥에서 찾다가, 눈이 너무 따가워 포기한다. 알람은 여전히 계속 울리고 있다. 다시 빠르게 물을 틀어 얼굴을 닦는다. 

얼굴을 닦다가 문득 "난 왜 이렇게 마음이 바쁘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제서야 비로소 마음이 멈춘다. 내 마음이 지금 너무 바쁘다. 떨어진 양치컵에 짜증이 날 만큼 바쁘다. 알람은 울리는데 알람을 끌 수 없기 때문이다. 빨리 씻고 알람을 꺼야 했는데, 떨어진 양치컵을 찾느라 시간이 지체되니 더 짜증이 났다. 계속해서 들리는 알람소리가 자꾸 마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왜? 난 왜 이렇게 알람을 끄고 싶어 안달일까? 소리가 요란해서? 아니다. 소리를 크게 설정하지 않았다. 소리가 듣기 싫어서? 그것도 아니다.

내 알람소리는 심지어 내가 요즘 좋아하는 대중가요다. 평소에 음악 틀어놓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하면서, 난 왜 지금은 '세수하는 중에 음악 틀어 놓은 것'으로는 생각하지 못하고, '세수하는 중에 하필 알람이 울리는 중인 것'으로만 생각할까. 

이 소리는 내게 왜 '좋아하는 음악소리'가 아니라 '꺼야만 하는 알람소리'일까? 소리에는 허물이 없다. 듣는 이가 문제다. 같은 소리인데, 어느 때는 음악으로 듣고, 어느 때는 알람으로 듣는 내 마음의 문제다. 이 소리를 알람으로 규정하고, 알람은 꺼야 한다는 생각에만 집착하는 나의 문제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정전> 무시선법에 '선이라 함은 원래에 분별주착이 없는 각자의 성품을 오득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하는 공부'라  하고 '시끄러운 데 처해도 마음이 요란하지 아니하고 욕심 경계를 대하여도 마음이 동하지 아니하여야   참 선이요 참 정'이라 했다. 

우리의 공부가 멀리,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소리엔 허물이 없음을 발견하는 그 순간이 바로 선공부의 순간이란 생각이 든다. 알람소리에 마음의 자유를 빼앗기고, 허둥대고 있는 내 모습이 그제야 환히 보인다. 이 소리가 '알람'이라는 분별 주착심. 단지 '소리'에 '알람'이라는 언어를 입혀, 온전함을 잃은 채 세안 하나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다시, 온전해진 마음으로 세안을 시작한다. 원래의 분별주착이 없는 본래의 내가 된다. 흘러나오는 소리가 더 이상 알람소리로 들리지 않는다. 이제야 비로소 내 손에 닿은 물과 세면대로 떨어지는 물소리도 들린다.

/중앙중도훈련원

[2018년 5월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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