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없어서는 상대방이 살 수가 없는 내가 될 때 
상대방은 '그 사람은 부처님이야'라고 할 것이다

[원불교신문=백인혁 교무] "네 아버지처럼 살면 숨 막혀 죽어. 아무나 그렇게 살지는 못해. 네 아버지가 별종이야"라고 했다는 어떤 교무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아들의 말을 무심히 듣기는 했으나 속으로 충격이 컸던지 며칠이 지난 후까지도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대종사가 살라고 한 대로 살려고 노력하며 살아왔는데 왜 그런 모습으로 비춰졌을까? 내가 대종사의 가르침을 받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 살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흉내만 내고 살았음일까? 소가 풀을 뜯어 먹고 우유를 내놓듯 교법을 표준 삼아 공부하여 여래행을 보이든지, 부처의 행실을 보였다면 사람들이 나로 인해 제도의 은혜를 입었으련만, 그런 말이 떠돈다는 것은 나의 공부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지 못하고 숨이 막히게 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거기에는 언제나 내가 들어서 공부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 이렇게 하라고 했구나. 그렇게 해봐야지!' 하며 여러 번 반복해서 어느 정도 되면 그것이 내가 대단한 것을 알아차린 것처럼 스승의 감정도 받지 않고 마냥 내가 대종사의 공부법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 양 살고 있었다.

그렇게 공부해온 나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주변 사람을 숨 막히게 하는 모습으로 비춰졌을 것이라는 생각과 이제라도 그런 말을 전해 듣고 다시 공부길을 점검하는 소중한 계기를 갖게 되었으니 언젠가 아들에게 그 말을 들려준 그분에게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내가 듣고 보고 알아차린 것을 기준으로 상대방의 삶을 그렇게 살면 되느니 안 되느니를 평가하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 일인가? '진리에는 원래 내가 있는 것이 아니며 내 육신 또한 진리의 나타난 바'라 했는데 나의 작은 지혜를 대단한 것처럼 여기고 진리와 합일한 것처럼 착각하고 살았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진리에는 내가 없으니 내가 아는 것도 없을 것이며 당연히 내 주장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없는 거울로 상대방의 살아가는 모습을 비춰본다면 또 다른 아름다운 삶의 모습으로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고 거기서 좋은 점을 찾아 배우며 살았을 것이다.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거나 도와달라고 하면 내가 없이 내 주장도 없이 무엇이든 도와주며 함께한다면 상대방은 나로 인해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일 것이다. 이렇게 내가 이 세상에 없는 듯 살면서 천하 모두를 나로 알고 살아간다면 모두는 다 나를 꼭 필요한 존재로 여기며 살게 될 것이다. 

물은 자신을 주장하지 않기에 어떠한 것을 만나도 다 화합하며, 물을 만난 대상은 새 생명을 얻고 새로운 힘을 얻는다. 공기 또한 자신이란 것이 없이 존재하기에 누가 공기를 사용할지라도 그대로 응해주고 그 대상이 자신의 역할을 다할 수 있게 돕는다.

이 세상에 없는 듯 사는 내가 없어서는 상대방이 살 수가 없는 내가 될 때 상대방은 나를 '그 사람은 부처님이야 성자야'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온전히 마음은 진리 전에 바치고 육신은 세상에 바쳐버린 나를 가꾸며 세상을 살아갈 때 나로 인해 상대방은 더 빛이 날 것이며 그러한 상대방으로 인해 세상은 낙원 세상으로 바뀔 것이며 대종사의 대원은 이 땅에 실현이 될 것이다. 

없는 듯 사는 나는 결국 상대방이 잘되어야만 내가 잘 되는 것이다. 이것은 너와 나 곧 우리가 잘되는 것이며, 내가 없고 내 주장도 없이 온전히 상대방처럼 상대방을 도와주니 상대방은 나를 남이라 여기지 않을 것이고 자신과 둘이 아닌 하나로 알고 살 것이다. 따라서 모두가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무아봉공의 실행을 아니 할 수가 없을 것이고 세상 모두를 다 자기품에 안고서 남이 아닌 자기로 알고서 살아가지 않겠는가!

/충북교구장

[2018년 5월 18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