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를 문제로 볼 수 있는 사람, 해결 의지가 있는 사람이 차기교단 지도부가 돼야 한다고 피력하며, 일생을 뜨거운 가슴 하나로 살았던 본산 나도국 원로교무.


"문제해결 의지 있는 사람이 차기교단 지도부 돼야"


[원불교신문=정성헌 기자]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Old soldier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한국전쟁 발발 이듬해 맥아더 장군이 투르먼 대통령으로부터 사령관직을 해임 당한 뒤 미의회 마지막 연설에서 한 명언이다. 그는 연설에서 한국 국민의 불굴의 의지를 치켜세우며 대한민국을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군대생활 52년 동안의 전의와 열정은 진실했고 사랑했노라는 표현으로 당시 병사에서 가장 유행했던 노래 한 구절로 심경을 대변한 것이다.
교단에 대한 진정어린 마음이야 어느 선진이나 다르겠느냐마는, 원불교와 아무 연고도 없었던 경상도 어느 부유한 교육자 집안의 수재가 출가의 길을 선택해 일생을 뜨거운 가슴 하나로 살았던 본산 나도국(73·本山 羅道國, 호적명 철호) 원로교무, 그가 스스로 알아보고 홀로 선택한 정법회상에 대한 마음은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일자출가 구족생천
대구 팔공산 자락에서 태어난 그는 불심이 장한 교육자 집안에서 자랐다. 경북고 재학시절 그가 불교에 관심이 많은 사실을 친구가 알고 원불교를 소개했고, 대구교당 항타원 이경순 교무의 '십이인연' 법문을 듣고 큰 발심이 나 출가를 선택했다.

경북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경상도 재가신도 모임단체인 거사림 회장까지 맡을 정도로 불법에 대한 신심과 이해가 깊었던 아버지는 아들의 이러한 선택에 "원불교에서 잘 키우셔서 좋은 인물 되도록 하십시오" 한마디 말로만 이 교무에게 맡겼을 뿐이었다. 그건 아마도 그가 경북고등학교 2학년 시절인 원기47년 <원불교교전>이 처음 인쇄돼 나왔을 때 아버지에게 가져다 드리자, 그 교리를 보고 "불교계 고목(古木)에 싹이 돋는다"며 원불교에 호감을 크게 가졌던 이유였는지 모른다.

일자출가 구족생천(一子出家 九族生天)이라 했던가. 아들이 출가하니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 외가 친척들까지 원불교에 입교했다. 그런데 외가 친척들의 입교가 훗날 교단의 큰 어려움을 풀게 되는 열쇠가 될 줄이야.

교단 수난기 시절의 동아줄
서울 남한강 사건이 터지고 10년이 지나도록 서울회관 공사는 중지된 상태로 건물 골조만 드러난 채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동작동 국립 현충원을 다닐 때마다 흉하게 서있는 그 건물이 눈에 거슬렸다. 그래서 측근이었던 대통령 사정특보에게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린다. 우연인지 다행인지 사정특보는 김영준씨로 나도국 원로교무의 외삼촌이었다.

조카가 원불교에 출가해 다니고 있던 터라 그 건물이 이미 원불교 건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조사를 마친 뒤 박 대통령에게 "현재는 불법 건물이고 서울시와 여러 가지 법에 묶여 있어 다른 자리로 옮기지 않는 한 해결할 방법이 없다"며 "원불교가 사기를 당해 지금도 해결하기 위해 전 교당이 은행에 저당 잡혀 돈을 넣고는 있지만 묶여있는 법들부터 해결하지 않는 한 회생이 불가능해 보인다"고 사실대로 보고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김 특보가 알아서 해결해"라고 특명을 내렸다. 

부친에 이어 법관 출신이었던 김 특보는 서울시와 합법적인 차원에서 불법사안들을 처리했고 공사가 진행되도록 실질적인 기여를 한다. 이후에도 그의 외삼촌 김특보는 막 지은 배내훈련원이 도시계획과 맞물려 뜯겨 나갈 지경이 되었을 때도 큰 도움을 주는 등 교단 수난기 시절 적지않은 힘이 됐다.

교단적 관행, 그 불편한 진실
그는 원불교학과를 졸업한 뒤 원기56년 원광대학교에서 숭산 박길진 총장 비서실장으로 근무하면서 교육에 대한 다양한 견문을 쌓게 된다. 이후 중앙청년회 사무국장을 겸직하며 교무부(현 교화훈련부)에 근무하다가 최연소 훈련부장이 된다. 최초 훈련부장(직제개편)이기도 했던 그가 착수한 일은 <교리통신강좌>를 만들었던 일이다. 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그에게 재가출가 교도들이 상시로 공부할 수 있는 교재를 지속적으로 발간시킨 일은 당시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그는 교단의 어두운 면도 직면하게 된다. "내가 놀란 것은 중앙법위사정위에 명단이 올라온 것을 보니까 재가교도들은 아예 한 명도 올려놓지 않고 교무들만 올라오는 거야. 사정위에서 당신들이 다 아는 사람들 뿐이었거든. 누구는 의도적으로 안 올리고, 올려놓은 명단은 다 동그라미 치는 거야."
그러한 중심에는 감찰원이 있었다. 사전 조율이라는 명목아래 명단을 누락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원광대학교 김정용 총장 재직시절에는 직원들이 소외되지 않고 사기를 올려줘야 한다며 법위승급자 명단까지 내미는 상황도 전개됐다. "이 같은 상황은 아는 사람 밀어주고 끌어준다는 이야기야. 통치수단이 돼버린 것이지. 항마도 졸업한 순서대로 잘라서 학년 올라가듯 준 것이지."

그는 그대로 볼 수가 없어 다산 김근수 교정원장과 당시 중앙법위사정위원들에게 승급기준에 대해 실무자로서 따지기도 했지만 그러한 관행은 변할 기색이 없었다. 그의 이러한 지속적인 문제제기는 어른들에게는 불편한 진실이 됐다. 이후 국제·교화순교감으로, 등촌1종합사회복지관장으로 일하다 원기99년 퇴임했다.

교단 정신의 하향평준화
교단은 어느덧 백년을 맞았다. 일본 오까야마·치바법인 사건의 미온적 처리, 교헌개정 좌초, 흐트러진 법위사정 등 몇 십년이 흘렀어도 도무지 바뀌지 않는 관행들에 그는 뜻있는 동지들과 원불교혁신포럼 공동대표로 나선다.

"나도 교단에서 처음 20여 년은 총부에서 살았거든. 순교감할 때에는 전국 교당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로 다녔어. 또 복지관에서 20년 재직하는 동안 대외활동을 하면서 세상이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 분명히 느꼈지. 지금 세상은 엄청나게 바뀌었어."

그가 세상을 보고 느끼는 동안 교단은 1980년대에서 그대로 멈춰 있었다. "전두환 시절 대한민국 사회가 경제 성장을 해 나갈 때 교단도 자연스레 경제성장을 이뤄나갈 수 있었지. 거기에 안주하다보니 정신적 성장을 할 기회를 잃어버린 거지. 이후에 한국사회가 IMF 등으로 어려워졌을 때 교단 성장도 멈춰버렸거든."
경제적 성장 거품에 외연적 확장에만 전력해 몸집만 커져버린 교단은 그동안 정신적 성장 동력을 마련한 변화의 기회를 놓쳐버린 점을 지적했다. 스스로 공부하고 그 결과를 인정받는 교단적 수행 풍토는 증발된 채 관행적 법위사정은 교단 정신의 하향평준화를 불러일으켰다. "법위사정 문제를 이대로 방치한다면 교법에 대한 정신이 무너지고 형식과 관행만 남게 돼 교단이 망하는 길로 가는 거야."

치명적인 실책, 일본 오까야마·치바법인
교단이 치중한 외연 확장의 결과는 일본 오까야마·치바법인 사건이라는 치명적인 실책까지 이어졌다. 무리하게 일본 교화를 전개하다 상당한 채무가 발생하자 부채탕감을 조건으로 나기사석재 기노시다 사장에게 법인을 넘긴 사건으로 현재까지 교단에서는 책임자도, 다시 찾아보려는 움직임도 없다.

"붓다 사후 백년즈음 되었을 때 제자들이 결집을 했는데, 그 이유는 교단이 분열되기 시작하기 때문이었지. 이유가 사소한 계문에서 비롯된 거야. 하지만 그러한 분열은 오늘날 불교의 발전으로 이어졌지만, 일본 오까야마·치바법인은 발전적 분열이 아니라 이욕을 위한 장사지. 하다못해 그들이 장사만 하면 괜찮지만 종교활동을 시작하면 사교가 돼버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눈뜨고 보고 있어야만 하나. 일본 건은 절대 그냥 둬서는 안될 일이야. 종교가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른 일이지."

그를 비롯한 원로들이 걱정하는 것은 원불교 명의가 삿되게 이용되고, 일본에 원불교 분파가 생겨날 다분히 위험한 상황임에도 그 누구도 책임지거나 찾으려는 노력이 없다는 점에서다. 소태산 대종사를 비롯해 수많은 선진들이 피땀 흘려 건설해놓은 소중한 교단의 일부를 잃었는데도 관심이 없는 지도부가 그에게는 너무나도 무책임해 보였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법위문제는 교법정신의 문제고, 일본 법인문제는 교조 정신에 대한 문제다. 오늘날 교단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떠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바로잡아야 할 문제이며, 양심고백을 받아야 할 사안인데 책임자들은 없고, 문제 해결 의지도 없다. 더 큰 문제는 문제가 잘못됐음을 잘못됐다고 똑바로 인식하거나 수용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스스로 감동받아 선택했던 정법회상이 물질의 노예로, 형식과 관행으로, 마치 사교집단처럼 변해가는 것을 보다못해 퇴임했어도 문제제기를 멈추지 않았다. "문제를 문제로 볼 수 있는 사람, 문제해결에 의지가 있는 사람이 차기교단 지도부가 돼야 한다. 그런 사람이 종법사가 되고 수위단원이 돼야 원불교가 살아날 수 있는 길이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2018년 5월 18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