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지은 교무] 일경이 사람을 보내 소태산 대종사에게 회견을 요구하자, 좌우 제자들은 경관의 무례함에 분개하며, 만일 대종사가 일개 경관의 오라가라 하는 말에 따른다면, 대종사 개인뿐 아니라 교단에 치욕적인 일이 될 것이라며 대종사를 만류한다. 

그러나 대종사는 "백성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국가의 치권을 쥐고 있는 관리가 오라고 하는데 가지 않을 권리가 무엇이랴, 그가 어떠한 행동을 한다 할지라도 나는 오직 무관할 것이며, 나의 지위에도 하등의 구애됨이 없도다"라며 순사를 면회하고 돌아온다. 대종사 경관을 만나고 돌아와 "경관이 도리어 버선발로 뛰어 내려와 황공해하며, 더할 수 없이 만족과 호감을 품은 거동이 눈에 보이더라. 앞으로 교단을 압제하려는 마음이 많이 줄어들었을 것이다"고 한다. (〈회보〉 6호)

누구나 대접받고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런데, 무엇이 들어서 나에게 위(位)를 주며, 또는 무엇이 들어서 나의 위를 손상케 하는 것일까? 이는 이날 대종사가 제자들에게 던진 질문이다. 
주위를 보면, 어쩐지 모르게 사람들이 다들 좋아하고, 귀하게 아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을 잘 보면, 공심이 있고, 나보다는 남을 생각할 줄 알고, 베풀 줄 아는 사람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한다. 

베풀기를 즐겨 하면, 대중의 대우도 부지불식간에 그 사람에게 돌아온다. 결국 대우를 받고 못 받는 것은 스스로 짓는 바에 달려 있는 것이다.

대종사 이날 돌아와서 제자들에게 한 법설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만약 참다운 위(位)를 구하고자 할진대, 우리에게 위를 주고 아니 주는 권리를 가진 저 여러 사람들이 무엇을 보아서 우리에게 위를 주고, 무엇을 보아서 우리의 위를 상하게 하는가를 자상히 보아서, 우리에게 위를 돌아올 그 일만 하여 버리면, 구하지 아니하여도 자연히 위가 돌아올 것은 명약관화의 사실이다."

이에 든 비유가 참으로 적절하다. "만석꾼이라는 부자의 이름을 구하는 사람이 다만 그 이름만 탐하여 다른 부자를 따라서 값비싼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부자의 행동만 모방한들, 그 삶을 만석꾼 부자라 하여 만석꾼 부자의 위를 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참으로 부자의 이름을 얻기를 원한다면, 밤낮으로 근검저축하여 앞마당에 만석의 벼를 먼저 쌓아놓고 보면, 누가 봐도 만석꾼이라는 표적이 나타날 것이므로 자연히 만석꾼 부자의 이름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존귀한 위를 구하기로 할진대, 무엇이나 나의 할 일만 하여 이 세상에 위 받을 만한 증거와 표적만 나타내고 보면, 저 여러 사람들이 그것을 보아 우리에게 위를 줄 것이다. 우리의 할 일은 하여 놓지도 않고, 위 먼저 구한다는 것은 만석의 노적을 쌓아놓지도 않고 만석꾼 이름만 구하는 사람이나 무엇이 다르랴."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다. 우리 교단이나, 개인이나, 남의 대우 없음을 섭섭해 하지 말며, 위를 구하려 굳이 애쓰지 말자. 만석꾼 부자가 마당에 만석 볏섬을 쌓아놓으면 자연히 만석꾼이라 불릴 것 아니겠는가. 그 광대하고 지혜로운 말씀에 그저 감탄하게 된다.

/미주총부법인

[2018년 5월 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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