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정도성 도무] 예술에서 '낯설게 하기'라는 기법이 있다. 친숙하거나 인습화된 사물이나 관념을 특수화하고 낯설게 함으로써 새로운 느낌을 갖도록 표현하는 방법인데, 러시아 문학 비평의 한 기법으로 사용됐으나 모든 예술 장르에 널리 활용됐다. 

처음엔 모든 것이 낯선 것이다. 그런데 낯설기는 하지만 그건 제대로 보고 듣고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아무런 편견이나 주관적인 판단이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낯선 상태에서 보고 들은 것이 본질에 더 가깝거나 본래의 모습을 제대로 간직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낯선 것도 반복적으로 보고 듣고 하다보면 관습적으로 굳어져서 일상적인 게 되고 만다. 일상적인 것은 참신하지도 않고 너무나 친숙한 나머지 본질을 잊어버리기 쉽다. 

이렇게 일상적이고 익숙한 이미지와 인식으로부터 벗어나 대상을 참신함과 새로운 시각으로 만나게 하는 것이 바로 '낯설게 하기'이다. 무의식에 습관화된 이데올로기나 매일 보는 일상적인 대상 속에 감춰져 있는 경이로움을 느끼도록 하는 데 주안점을 둔 예술 기법이다. 대표적인 예로 마르셀 뒤샹의 작품 '변기'를 들 수 있다. 화장실에 있으면 그냥 변기일 뿐이다. 그러나 전혀 상관없는 미술관에 전시함으로써 변기는 낯설고 새로운 대상, 즉 예술 작품이 된다. 이때 변기는 변기의 용도와 상식적인 관련성을 넘어, 보는 이의 이목을 환기시키고 신선한 충격을 준다. 

불교의 공안이나 화두, 또는 의두 성리도 모두 '낯설게 하기'이다. 관행을 벗어던지는 작업이다. 익숙함을 떨쳐버리고 낯설게 하기, 익숙해진 내 인식을 깨뜨리고 낯선 세계, 세계의 본질로 들어가는 것이다. '세존이 도솔천을 여의지 아니하고 이미 왕궁가에 내리시며, 모태 중에서 중생 제도를 마치셨다 하니 이게 무슨 뜻인가?'(〈정전〉 수행편 의두요목) 공간과 시간의 순서, 시공에 대한 상식적이고 순차적인 인식의 과정을 완전히 뛰어넘고 깨뜨리는 '낯설게 하기'이다. 

'세존이 열반에 드실 때에 내가 녹야원에서 발제하에 이르기까지 이 중간에 일찍이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고 했다는 말씀도 그렇다. 49년 동안 팔만 사천 법문을 설하시고는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한 건 법에 대한 상식, 법을 설하는 행위 자체에 대한 인식을 부정한다. 또한, 부처님의 법문에 기대어 마치 내 것인 양 익숙해져서 부처 흉내만 내지 말고, 내가 곧 부처이며, 내 안의 부처를 바로 찾으라는 역설(逆說)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낯설게 하기'는 '새롭게 보기'이다. 늘 익숙한 자리에서 익숙한 말씀을 익숙한 형식으로 만나면, 말씀이 쉬워 보이고 그저 그런 법문으로 여기기 쉽다. 의두·성리를 연마함으로써 고정된 관념을 깨는 작업과 함께, 전체 교리에 담긴 편편 법문을 새롭게 보고, 뒤집어 보고, 잘라보고, 이어보고, 따로 떼 내어 보고, 다르게 보는 작업, '낯설게 하기'를 통해 법문을 만날 일이다.

세존이 영산에서 꽃을 들어 보이니 가섭 존자만이 웃었다. 이심전심 염화미소(拈華微笑)다. 그런데 가섭이 미소 지을 때 대중은 다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대중은 왜 다 묵연했을까? 대중의 침묵은 무엇을 말하는가?

[2018년 5월 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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