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한 가지 일을 하고 나면 우리 마음은 그것이 잘 되었는지 잘 안 됐는지 바둑시합 후 복기하듯 자신을 성찰한다. 돌아보는 이 마음은 공적영지심에서 나온 것이다.

알고 보면 우리 마음은 천지간에 두루 통한다. 새소리를 듣는 마음과 그 소리를 분간하는 마음은 텅 빈 중에도 작용하는 신령한 마음작용이다. 나아가 원적무별한 마음은 우주와 하나 된 상태다. 세계는 나와 함께 있다. 이러한 마음은 좌선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광활한 우주 속에서 한 마음을 열고 바라보면 그것 또한 깨달음이 아닐 수 없다. 

주의와 조행은 이처럼 신령한 마음 작용이 일상에 투여된 것이다. 일원상 진리의 온전(穩全, 본바탕 그대로이자 올바른 상태)한,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마음을 자신의 삶 속에서 구현하는 일이다. 물론 주의는 하기로 한 일과 안 하기로 한 일을 잊어버리지 않고 실행하는 마음이며, 조행은 대조 공부를 통해 사람다운 행실을 가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마음의 밑바탕에 무엇이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석가모니불이 깨달은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알아차리는 마음인 사띠(sati)로써 집중과 관찰을 통해 무상(無常)·무아(無我)·고(苦)의 세계를 극복하고 영원한 열반과 해탈의 세계에 이른다. 연생연멸(인연에 의해 생멸하는 것)의 세계를 통찰하는 마음이야말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인 것이다. 이 사띠는 주의와 조행을 행하는 공적영지심과 근본적으로 통한다.

우리는 이미 본각의 세계에 살고 있다. 삶 속에서 실천하는 일상수행은 깨달은 가운데 수행하는 묘수(妙修)임을 자각해야 한다. 수행과 깨달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삼학의 기본구조로 구축된 상시훈련은 이러한 본각의 마음을 돌이켜 바라보게 한다. 앉아서 불성을 찾는 것만을 좌선으로 생각하지 않고, 챙기는 마음 그 자체가 본각으로 들어가는 세계의 문이다.

하루아침에 그러한 세계가 열리지 않는다고 포기할 것도 없다. 선지식으로부터 지도받는 가운데 어느 날 자신이 부처임을 문득 자각하게 될 것이다. 자각후의 세계 또한 여여(如如)할 것이다. 그러나 확연한 것은 닦지 않는 중에 저절로 행해지는 닦음은 무한공덕을 낳는다.

오늘날 현대사회는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혁명의 시대〉를 통해 말하듯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 유럽에서 일어난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인 소위 이중혁명의 세례를 받고 있는 중이다. 구체적으로는 프랑스혁명과 영국의 산업혁명을 말한다. 한국사회 또한 예외가 아니다.

해방 후 급속한 산업화를 거쳐 지금은 4차 산업혁명을 향한 도약의 길에 들어섰으며, 최근의 촛불혁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민주화의 정점을 찍고 있다. 이러한 힘으로 이제 냉전의 산물인 한반도 분단을 청산하고 평화와 통일의 올곧은 여정에 들어섰다. 한국사회는 보편역사의 흐름을 밟고 어변성룡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 길의 성숙을 위해서는 거쳐야 할 한 단계가 남아 있다. 그것은 도덕·윤리사회의 정착이다. 이중혁명의 과정을 겪으면서 필연적으로 갖춰야할 사회적 덕목인 도덕·윤리를 도외시해왔다. 조행은 이러한 사회적 인간, 인간적 사회를 위한 필수요소다. 주의의 사회화인 셈이다. 조행은 신앙·수행의 인격과 인류문명이 불가분의 관계임을 보여준다. 

/원광대학교

[2018년 5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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