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김기원 교무] 그렇게 아름답던 영산의 선원생활도 졸업이 다가오면서 출가가 현실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선원에 입학하기 전에는 기대찬 제2의 인생을 설계하고 준비하면서 종교생활을 위한 원불교학과 수업, 자원봉사로 외국인학생 교화를 위해 사회복지사와 한국어교사 자격을 준비하며 꿈을 키워 왔다. 그러나 이제는 자원봉사자의 프리랜서가 아닌 전무출신으로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활동에 제한을 받게 된다는 것에 눈뜨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예비정토는 새로운 꿈에 부풀어 있었다. 본인도 기간제 전무출신을 서원하겠다는 꿈을 버리고 정무로 활동하겠다고 했다. "교도의 마음은 교도였던 내가 잘 안다"며 "고향에 있는 교당으로 발령받아 60년 동안 만들어온 인연을 영생의 인연으로 바꾸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교화에 전력해 백명을 입교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오십년 가까운 교도생활에서 얻은 경험으로 정무에 대한 자신감과 새로운 꿈을 키우고 있었다.

이러한 예비정토의 꿈은 나에게도 방향을 제시해 줬다. 그곳의 다문화가족 업무를 하는 지인이 한국어교육 봉사를 해주겠다며 환영해 주기도 했다. 그곳에는 외국인 학생은 없지만 공단이 있어서 외국인 노동자가 많은 곳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도움을 많이 필요로 하고 있으므로 교무가 외국에 나가서 이방인으로 하는 교화보다 국내에 거주하는 2백만 외국인 노동자의 교화가 훨씬 쉽다는 것을, 나 스스로가 외국에 머물러본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에 있을 때 개신교 신자가 돼야 했다. 교회에 다니는 것은 예배가 목적이 아니고 외국생활에서의 많은 어려움이 해결 되는 곳,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 다른 곳보다 서로를 존중하고 존중받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외국인에게는 교화가 아닌 봉사로 다가가고 그 속에서 믿음이 만들어지므로 '교화를 잊음에서 교리가 전달됨'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외국생활 경험돼 국내에서 외국인 노동자 교화 서원
만덕산훈련원 생활은 공부심 뿌리내리게 하는 거름

하지만 사은의 뜻인지 올해 만덕산훈련원으로 발령을 받게 됐다. 소태산 대종사와 제자들의 초선터로써 4대 성지이기도 한 이곳에 내가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만덕산훈련원은 또한 만덕산훈련원교당이기도 하다. 매주 일요일 아홉시에는 일요법회를 본다. 그리고 영농조합으로 농원이므로 농사도 짓고 버섯도 수확한다. 그리고 이번 달에는 특이하게 천도재도 세 분 모셨다. 또 단장중앙 훈련을 전담하고 있으므로 전국으로 출장을 다니게 되니 의도치않게 전국을 유람하는 관광도 즐긴다.

교도정기훈련과 동하선 등으로 준비하고 진행하다보니 그 속에서 얻게 되는 배움이 많다. 하지만 행동이 민첩하지 못해서인지 나는 아직 내가 해야할 업무 인수인계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법회설교 준비도 제대로 못하면서 나의 하루는 자고 먹고 일하고 세 가지만이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직 이러한 업무와 일정에 익숙해지지 않은 데다가 자료가 모여지지 않은 처지이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기도 하다. 이런 내 모습이 마치 신입사원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몇 달 지내다보니 이전의 사회경험과 교당 다니던 경험에 더하여 열심히 노력한 결과인지 자연스레 정기훈련에도, 단장·중앙훈련에도 투입돼 분반활동도 하고 좌선주례 등을 진행하게 됐다. 훌륭한 원장과 동료 교무의 도움으로 발전해 가는 나를 보면서 스스로 놀라고 있다.

또 만덕산훈련원에서 진행하는 3주마다 실시하는 설교를 하면서 나를 돌아보는 기회를 갖는다. 거의 매주 실시하는 교도정기훈련, 단장·중앙훈련을 진행하면서는 배우는 사람보다 가르치는 일이 스스로에게 발전이 급진됨을 종종 느낀다. 그리고 훈련하는 교도들에게 더 알찬 내용과 환경을 만들어 드리지 못했음을 반성하고 개선하면서 나름 발전해가는 모습도 스스로 느끼곤 한다.

만덕산훈련원에서 훈련받는 교도들보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며 아직은 힘든 생활인 듯싶지만 내 자신에게 뿌려주는 거름이라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만덕산훈련원

[2018년 5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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