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혜성 교무] 훈련이 있는 날 아침이다. 훈련생 이 400명에 달하기에, 이곳엔 팽팽한 긴장이 감돈다. 바쁘게 진행될 오늘의 일정을 머릿속으로 점검하며, 익숙하게 컴퓨터를 켠다. '어?  켰는데.' 분명히 켰는데 컴퓨터가 안 켜진다. 

10분 여를 기다려도 부팅이 되지 않는다. 불길하다. 컴퓨터를 강제로 종료하고 다시 켜본다. 여전히 안 켜진다. '이게 무슨 일이지?' 오늘 중요한 날 아침이다. 

이 컴퓨터에 있는 자료를 인쇄해야, 훈련에 차질이 없다. 날벼락이 떨어졌다. 먹통이 되어버린 컴퓨터를 붙잡고, 울고 싶은 심정이다. 아무리 시도해도 복구가 되지 않는다. 윈도우를 다시 설치해야 한다고 옆에서 조언한다. 하지만 그 선택을 하면, 미리 작업해뒀던 많은 자료들은 다 사라진다. 

난 뭐든 밀려서 하는 것은 싫다.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 미리미리 해두는 작업이 많다. 예를 들어 이 컴퓨터 안에는 벌써 〈원불교신문〉에 보낼 완성본 원고 4편도 들어있다. 그 자료들이 다 사라진다는 뜻이다. 

너무 아깝다. 옆의 조언을 듣지 않고, 계속 '복구'버튼만 누른다. 시간은 가고, 여전히 복구는 되지 않는다. 한 시간여 지났을까.  아까움에 몸부림치다가 문득 '이미 벌어진 일이다' '툭 놓아버려라' 현실을 직시한다. 복구를 포기한다. 마음이 쉬니, 심신작용이 눈에 보인다. 

어제까지 멀쩡했던 '내 자료'였다. 오늘 느닷없이 '내 자료'가 사라졌다. '상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니 되돌리고 싶은 미련을 잡고 있다. 그 와중 가장 큰 오류는 '내 것'이 '없어졌다'고 속상해 하는 사실이다. 있다가 없어지면 '상실'했다고 한다. 

내가 가진 자료가 사라지는 상실,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는 상실, 혹은 내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상실. 그리고 그 모든 상실은 언제나 아프다. 이 모든 것을 단지 '변화'로는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생사가 원래 둘이 아니요 생멸이 원래 없는지라, 깨친 사람은 이를 변화로 알고 깨치지 못한 사람은 이를 생사라 하나니라"고 법문했다.(<대종경> 천도품 8장) 

태어나고 죽는 것도 원래 둘이 아니고 생기고 없어지는 것도 원래는 없는지라, 깨친 사람은 이를 '변화'로 '안다'는 말이다.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도 있어지는, 모든 것이 단지 '변화'일 뿐이다. 

'변화'라니, 말은 쉽다. 하지만 당장 내 앞에 닥치면, 작은 상실 하나도 '변화'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단지 '변화'인 줄 모르니 참 아프다. 

나 역시 사랑했던 아버지의 갑작스런 열반을 '변화'로 받아들이기 까지, 너무 많은 시간 크게 아팠고 매일 울었다. 그런 몸부림을 겪고 나서야, 조금씩 상실들이 '변화'로 보이곤 한다. 오늘 아침의 일은 내게 있었던 작은 변화일 뿐이다. 있다가 없어지는 것을 '상실'로 보지 않고, 단지 '변화'로 바라보는 눈. 그리하여 '변화' 안에서 '순'하게 '응'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 마음공부의 또 다른 실천강령이 아닐까. 

변화는 그저 변화일 뿐 오해하지 말자. 

/중앙중도훈련원

[2018년 6월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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