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전에 이웃종교인들과 중동 성지순례를 한 적이 있다.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에서 주로 초기 기독교의 흔적과 현재의 이슬람 사원을 방문했다. 특히 이슬람사원에서 느낀 것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낮에는 누구든지 이곳에서 토론도 하고, 낮잠을 자기도 하고, 명상을 하기도 하는 모임과 휴식과 신행의 공간이었다. 

밤이 되자 동네 사람들이 다 모였는지 아이들, 노인, 가족, 젊은 청춘들이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돌아다녔다. 성인의 묘소가 놓인 성소에서는 자신의 가슴을 치며 눈물 흘리고, 창살을 붙들며 꾸란을 외고, 큰소리로 통성기도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때 나는 '성전은 일상의 축제가 일어나는 곳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교당내왕시 주의사항'에서 말하는 교당은 모스크처럼 그 마을의 중심이 돼야 한다. 그리고 관혼상제를 위한 공동의 장소이며, 인간의 희로애락을 터놓고 이야기 하는 장터가 되어야 한다. 전통과 문화를 계승하고, 교육과 상담을 하는 학교가 돼야 한다. 교당은 신도나 교도에게만 국한되지 않으며, 모든 시민이 모여 대소사를 논의하는 마을회관이 돼야 한다. 

모든 교당은 간판을 하나 새로 달아야 한다. 하나교당은 하나마음학교, 통일교당은 통일마음학교로. 그곳에서 문답감정의 마음공부를 하며, 이생에서 자신의 마음이 어느 수준인지 진단 받고, 꾸준히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지도를 받는 곳이 돼야 한다.

교무는 이처럼 내담자 스스로 자신과 이웃과 진리와 대면하게 하는 마음공부의 상담자, 지혜를 통해 삶을 통찰하게 하는 구루, 모든 고통과 고난을 어루만지는 부모로서 회광반조, 환지본처하게 하는 진리의 주관자가 돼야 한다. 또한 열반인들에게는 그들의 외로운 영혼을 쓰다듬으며 새로운 다음 생을 안내하는, 스타팅케어의 임종선지식이 돼야 한다.  

김용옥은 〈금강경강해〉에서 "원불교에서 내가 가장 상찬(賞讚)하는 것은 그 핵심교리에 있어서 모든 교리의 포용, 인간세의 모든 종교와의 화해를 적극적으로 표방하고 또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고 한다. 진정한 회통은 이러한 실천이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것이다. 남북의 화해, 동서의 화해, 과거와 현재의 화해, 계층의 화해는 물론이고, 차별·멸시·반목·갈등·대결·분쟁의 중재가 교당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렇게 될 때 교법에서 말하는 진리적 정의(正義)가 구현되는 것이다. 그것이 화쟁이다. 원불교의 회통성은 역사 이래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길을 가야하며,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원불교 출현의 의미가 완성된다.

교당은 플랫폼이다. 기차가 도착했다가 떠나는 플랫폼. 사람들은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내리고 떠난다. 교당은 그러한 플랫폼이 돼야 한다. 모든 시민들이 저마다 들렀다가 떠나는 곳, 마을과 도시와 농촌의 플랫폼이 돼야 한다. 지역의 모든 일들이 교당에서 논의되고, 그곳에서 결정되며, 그 결정의 보증인은 교무이자 그 보증의 도장은 일원상 진리가 돼야 한다.

새로운 문명사회의 새로운 중심은 바로 교당이 돼야 한다. 삶의 콘텐츠(내용)가 이곳으로 몰려들고, 그 삶에 동력을 부여하고, 새로운 희망을 얻어 먼 길을 떠나는 자의 플랫폼이 돼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교당이 중생들의 마음 고향이 되고, 세월이 흘러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의 중심지가 돼야 한다.

/원광대학교

[2018년 6월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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