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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 / 원대연 창립멤버, 원전회 역사의 산증인
신앙인 / 원대연 창립멤버, 원전회 역사의 산증인
  • 민소연 기자
  • 승인 2018.06.19
  • 호수 189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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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교구 은평교당 문인채 교도

[원불교신문=민소연 기자] 영광 해룡고에서 집결한 대학생들은 영산성지까지 도보순례를 시작했다. 그날따라 눈보라가 심해 손에 손을 잡고 서로를 의지해 걸었다. 2~3시간이면 갈 거리를 온종일 걷는 것 같았다. 교단 초기 스승님들은 이보다 더 험한 길을 더 힘들게 걸었겠구나. 그리 걸어 우리가 이토록 큰 은혜 속에 사는 거구나라는 생각에 다들 말없이 숙연했다. 원기63년 12월, 전국 원불교 대학생 연합회(이하 원대연) 성지순례 첫날이었다.

앞뒤로 뛰어다니며 수십 명의 대학생 행렬을 이끌었던 은평교당 인산 문인채(60·仁山 文仁採) 교도. 그에게는 다음날 산상 촛불기도도 손에 잡힐 듯 떠오른다. 

"겨울인데다가 바닷바람이 많이 불었는데, 종이 한 장으로 감싼 초들이 기도 내내 꺼지지 않았어요. 다들 그랬죠. 이건 선진님들이 '여기까지 잘 왔다'고 기운을 모아주신 거라고요."
꼭 40년 전, 그 기억만큼은 여전히 생생하기에 오는 원대연 40주년 기념대회에도 애정이 남다르다. 당시 원불교 원광보건대학 교우회(원전회) 재학 중 원대연 창립에 함께 했던 그는 선배 회장단을 보좌하는 심부름꾼인 초대간사를 맡았다. 전국 교우회며 학생, 교무에게 연락하느라 일주일이면 두세 번씩 총부에 들어갔다. 오죽하면 교무들이 "너는 공부 안 하고 맨날 총부에 사냐"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

"원대연을 창립하자는 열기가 대단해서, 그해 8월 창립총회에 참석한 학생만 100명 가까이 됐어요. 총회 이후에도 연락하고 회보 〈하나이니 하나로〉도 우편 발송하는 등 역할을 맡았지요."
그해 한남동 예술인교당에서 열린 임원진 2박3일 훈련에서 겨울 성지순례와 여름훈련 및 창립총회가 결정됐다. 해룡고부터 성지까지 눈보라 속을 걸었던 순례가 바로 그 해의 일이다. "모두가 한 마음이었으니 계속 잘 될 줄 알았죠. 그런데 이듬해 계엄령이 선포되고, 학교가 폐쇄됐어요. 딱 1년 활동하고 거의 10년 동안 어려운 시절을 거쳤습니다."

그러는 사이 창립멤버들은 학교를 졸업했고 뿔뿔이 흩어졌다. 당시 활동을 했던 선후배들 중 교당에 남아있는 이들은 겨우 20~30%. 사회 분위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그가 한번도 끈을 놓은 적 없는 원전회에 비춰보면 아쉬움도 크다.

"30여년 전 동문회를 만든 원전회는 지금도 1년에 2번 만나 법회도 보고 재학생 장학금도 전달합니다. 물론 종립학교 종립교우회인 것도 있지만, 창립초기부터 계속 선후배 만남을 지속해왔던 것이 유효했어요."

대학생 교화 역시 이런 맥락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그. 각 교우회마다 매년 한번씩은 선후배가 만나야 하는데, 요즘같이 취업이나 진로가 어려울수록 선배와의 만남이 더 의미가 크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담당 교무님들이 대학생이나 교우회 교화에만 전념하며 함께 호흡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은 담당 교무들이 열심히 하려해도 집중할 여건이 안되고, 교단에서도 대학생 교화가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지원도 부족하지 않나 생각돼요."

부교무처럼 교무 숨통 되어주는 교도
선후배 만남이 중요, 성지순례 문화 살려야

또 하나, 머리로 이해하고 공부심을 진작하는 대학선방 만큼이나 가슴으로 성자의 혼을 체받는 성지순례가 중요하다는 그다. 

"사실 원대연이든 교우회든 미친 사람이 하나 있어야 잘 되는 것 같아요. 원전회 동문회 30여년 동안 지난해만 수술하느라 딱 한번 빠졌거든요. 지금도 내 마음의 고향이라고 하면 원전회 동아리방이 떠오릅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원불교 동아리를 찾아갈 정도로 이미 신심이 확고했던 문 교도. 그는 원기57년 중학교 시절 오수교당에 입교했다. 할머니 따라 교회에 다녔던 그는 교당에 오자마자 열린 교리강연회의 '부모은' 설법에서 실지불공, 당처불공 이야기에 완전히 매료됐다. 

"제가 복이 많은 세대인가봐요. 그때도 남원지구 학생회가 모였다하면 50명은 너끈했어요. 매년 체육대회도 하고 남원교당에서 토요법회를 마치고 자기도 하고요." 내 교당 남의 교당 할 것 없이 집처럼 드나들던 버릇은 그에게 평생 습관이 됐다. 일요일이면 어디를 가든 근처 교당을 찾아 법회를 보는 것이 당연하며, 영동교당, 방배교당을 거쳐 은평교당 문을 두드린 것도 그 스스로였다. "서른셋에 아내(박희선 교도)와 교당에 오니 막내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교무님은 대종사님 대행자다, 교무님 말씀이 곧 대종사님 말씀이다 생각하니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다 했지요."

비만 오면 은평교당 옛 건물 창고에서 물 퍼내러 바가지부터 들고 달려왔던 그. 환갑의 그는 부회장이자 교무로부터 '우리 교당 부교무이자 교무 숨통이 되는 교도'라고 불릴 정도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청년의 힘찬 열정이 살아있는 여전히 젊은 문 교도, 그에게 신앙인으로서 남은 서원을 물었다.

"두말 하면 뭐하겠어요. 당연히 출가죠. 이번 생에도 하려다 못해 아쉬웠거든요. 특히 원대연이나 대학생 교우회를 지도하는 교무가 돼, 40년 전 그 법열 넘치는 분위기를 살려내는 데 도움이 되고 싶어요."

원대연 40주년 기념대회만 생각하면 두근두근 설렌다는 문 교도. 8월 총부에서 열리는 그 반가운 자리의 주인은 바로 그가 될 터다.     

[2018년 6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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