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지은 교무] 소태산 대종사는 잠깐이라도 방을 떠나게 되면 문갑에 자물쇠를 채웠다. 한 제자가 그 이유를 묻자, "나의 처소에는 공부가 미숙한 남녀노소와 외인들도 많이 출입하나니, 혹 견물생심으로 죄를 지을까 하여 미리 그 죄를 방지하기 위함이다"고 말했다. 

우리가 문단속을 하는 것은 보통은 내 물건을 도둑맞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성자는 상대가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문단속을 했다. 물건을 도둑맞게 되면, 대개는 물건을 훔쳐간 그 도둑을 원망하거나, 조금 더 성찰을 하는 이라면, 물건을 부주의하게 놓은 자신을 자책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문단속을 잘못해, 혹은 물건을 잘 간수하지 못해 그로 하여금 죄를 짓게 했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여기에 성자와 범부의 차이가 있다.

소태산 대종사는 "'공부가 미숙한' 이들이 혹 죄를 지을까 싶어 문단속을 한다"고 했다. 여기에서 '미숙'이란 단어는 말 그대로 '아직' 익지 않았다는 뜻이다. 대종사는 그 누구도 처음부터 도둑인 사람은 없다고 본 것이다. 비록 죄를 지을지언정 그것은 그의 공부가 '아직' 익지 않아 그런 것일 뿐, 공부를 하여 마음에 깨침을 얻고 보면, 누구나 선인이요,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소태산 대종사의 인간관(人間觀)을, 은연중 사용한 '미숙'이라는 이 단어에서 엿볼 수 있다. 

소태산 대종사는 대자대비(大慈大悲) 중 대비에 대해 설명하기를 "대비라는 것은 저 천지 분간 못하는 어린 자녀가 제 눈을 제 손으로 찔러서 아프게 하며, 제가 칼날을 잡아서 제 손을 상하게 하건마는 그 이유는 알지 못하고 울고 야단을 하는 것을 보면 그 부모의 마음에 측은하고 가엾은 생각이 나서 더욱 보호하고 인도하여 주는 것 같이, 부처님께서도 모든 중생이 탐진치에 끌려서 제 스스로 악도에 떨어질 일을 지어, 제가 지은 그대로 죄를 받건마는 천지와 선령을 원망하며 동포와 법률을 원망하는 것을 보시면 크게 슬퍼하시고 불쌍히 여기사 천만방편으로 제도하여 주시는 것"이라고 법문했다. (〈대종경〉 불지품 3장) 

뉴스에서 극악무도한 파렴치범에 대한 기사를 접하면 일면식도 없는 그 범인에 대해 마음속으로부터 분개할 때가 있다. 형량이 적게 나오면 법과 정의는 어디 갔느냐며 대중의 공분을 사기도 한다.  우리 공부인들은, 그럴 때 문단속을 말씀한 대종사의 심법을 떠올려보자. 물론 법과 정의는 공정하게 집행이 돼야 하겠지만, 그들도 '공부가 아직 익지 않은' 중생일 뿐이라는 사실까지 잊지는 말자. 예수도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는 말라 하지 않았던가. 

무엇보다도 죄를 짓고 악도에 빠져 가장 고통을 겪는 이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 본인이라는 생각을 하면 측은지심이 생긴다. 대종사는 '나는 인과의 원리를 알아 복만 짓고 죄는 안 짓도록 영생을 노력 하려고 할 뿐이다'고 말씀했다. 

대종사와 같은 성현도 죄짓기를 조심했으니, 하물며 우리들은 하루하루 그 일 그 일을 여리박빙의 심경으로 대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또한 각자의 자리에서 다른 이들도 그렇게 살도록 깨우쳐 주는 데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미주총부법인

[2018년 6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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