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의법향/ 일타원 김성윤 원로교무

[원불교신문=정성헌 기자] 철학자 윤구병 선생이 풋내기 농사꾼이었던 시절에 잡초로만 보이던 풀들을 잔뜩 뽑아버렸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잡초들은 제각각 이름을 가진 들풀들이자 약초들이었으니, 이 세상에 존재 이유가 없는 풀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뒤늦게 출가해 한평생 들풀처럼 살았던 일타원 김성윤(74·日陀圓 金誠潤) 원로교무. 지나온 행적이 초라해 이름없고 능력없는 선진이라며 한없이 자신을 낮추었지만, 누구보다 이 회상을 만난 기쁨과 신심으로 한 생을 오롯하게 살아낸 그의 일생은 순수로 일관한 전무출신 삶 자체였다.

이 내 몸을 이 생에 제도 못하면
그는 경상북도 선산군에서 5남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하지만 당시 사회적 환경이 좋지 못한 탓에 9형제 가운데 2남1녀만 남아 수학선생이었던 오빠에게 의탁해 살았다. 훗날 큰 오빠 김연철은 대구시 교육감을 2번이나 하고, 둘째 오빠는 중학교 교장까지 한 교육가 명문 집안이 되었지만 당시 환경은 간난했었다.

그가 서른살이었을 즈음 올케는 친정고모가 원불교를 다닌다며 대구교당을 소개했는데, 조심성이 많았던지라 혹시 사이비가 아닌지 당시 백과사전을 찾아보았는데 '원불교'는 나와 있지 않았다. 그래도 사돈이 나가고 있다는데 안 가볼 수 없어서 한번 나가보기로 결심했다.

"당시 대구교당에 성타원 이성신 교무가 계셨는데 설교 시간에 '바닷물도 빗물이 모여서 바닷물이 되고, 산도 먼지가 모여서 산이 된다'고 그래. 내가 그것을 왜 몰랐던고 싶은 거야. 생각해보면 산수보다 더 쉬운 것인데 왜 이것을 몰랐을까 했지."

그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성가였다. '사람되기 어려운데 이미 되었고, 불법듣기 어려운데 이미 듣나니, 이내 몸을 이 생에 제도 못하면, 어느 생을 기다려서 제도하리요(〈원불교성가〉 발분의 노래).' 이 성가를 듣고 보니 집에 다시 갈 수 없었다. 내가 이미 사람 몸을 받았고, 여기와서 불법까지 들었는데 이 생에 제도해야겠다는 한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그는 그 자리에서 이성신 교무를 모시고 4년동안 간사생활을 했다.

별다른 능력은 없었지만
그가 첫 발령을 받은 곳은 부안교당이었다. 주임교무는 장정현 교무였다. 늦깍이 출가로 나이가 많은 그가 갈 만한 곳이 없어 총부에서도 고민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 당시 여성교역자가 있는 교당으로 부교무로 보내자니 나이가 비슷했기 때문에 차라리 남자교역자가 있는 부안교당으로 발령을 낸 것이다. 그곳에 3년을 살다가 주임교무가 인사이동하자 그는 괴산교당 주임서리로 이동했다.

그는 참 감성이 풍부했다. 괴산선교소 법회 때 성가만 부르면 눈물이 나왔다. 그래서 성가식순이 나오면 교도들에게 "성가 부르세요"하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방에서 울다가 성가가 끝날 때쯤이면 다시 나와서 법회를 보곤 했다.

"노래만 나오면 감정이 풍부해서 눈물이 나와. 대구교당에서 들었던 성가가 좋아서 전무출신 지원서까지 냈는데…. 그런데 내가 음성도 안 좋고 음치여. 음성을 누가 들으면 성가가 좋아서 전무출신했을 거라고 믿을 사람 없을 거여."

어느 날 한 교도가 교무님 오셨다며 재를 모셔달라 했다. 초재를 지내니 '천원'을 내놓는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만원을 올려놓은 것과 같다. 육재까지도 천원을 내놓더니 종재즈음 남편이 재를 모신다는 사실을 알고서 4천원을 맞춰서 내놓았다. 시절도 시절이지만 교도들도 교당도 원체 가난했다.

하지만 그는 없는 살림이었지만 교도들에게 성심성의를 다했다. 어느 교도가 고추밭 일한다며 애기 봐달랬는데 업고 다니며 우유도 타주고 정성으로 보살폈다. 또 혼사를 일주일 앞둔 처자가 와서 "돈이 없어 결혼식을 못 올린 친정오빠가 먼저 결혼식을 올려야 제가 결혼을 할 수 있다"는 하소연에 교당에서 서툴지만 그럴싸한 장식을 해서 결혼식도 올려줬다. 서울에 사는 어느 교도 아들은 아버지 환갑잔치를 교당에서 했으면 해서 없는 살림에도 이러저러한 준비를 해서 소박하지만 정성스런 환갑잔치도 벌였다. 그는 교도들의 나무그늘 같은 역할을 하며 6년을 보냈다.

다음 임지인 수산선교소에서도 그는 특별한 능력은 없었지만 교도들에게 정성을 다했다. 학생 회원들을 위해 대구 서문시장에 가서 천을 떠와 미키마우스 만화가방을 만들어주니 그렇게 좋아들 했다. 또 괴산선교소에 살 적에 잠시 배운 붓글씨로 교도회장 자녀 명명식을 할 때 큰 종이에 이름을 적어놓고 기도도 올렸다.

"지금 생각하니까 그 글자가 시원치도 않은데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이거요. 기도 끝나도 내버리면 안됩니다. 아 클 때까지 간직해야 합니다' 그랬지." 이런 순수한 그의 행적에 교도들은 따랐고, 2천만 원을 모아놓고 나왔다.

염불하러 따라 나온 아이
이후 차황선교소으로 이동한 그는 전임이었던 정안심행 교무가 모아놓은 250만을 인계받았다. 그가 갔던 차황선교소은 정안심행 교무가 다대교당에서 퇴임하면서 수양처를 찾던 중 정착한 곳으로 논에다가 울타리나 담이 없이 허름한 3칸 집을 지어놓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 동네 대부분이 다 교도인 곳이기도 했다.

"정안심행 교무님이 연세가 많으셔서 밥을 혼자 해드실 수 없으니까 총부에 가서 당신이 지어놓은 집을 교당을 받아줄라냐고 했던가봐. 총부에서 와서 보니까 집이 옹색해서 교당으로 하기에 딱했나 보더라고. 그래서 정안심행 교무님이 '거 싫으면 동네 회관으로나 내놓을란다'하니까 총부에서 버리기는 아깝고 해서 차황교당이 된 거지."

그가 와보니 법당도 새로 넓혀야겠고, 이리저리 불편한 것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교도회장에게 백만원을 내놓으며 "이것이 전부인데요, 수리 좀 잘 해주소"라고 부탁했다. 보통 일이 거래될 때 흥정하기 마련인데, 이제 갓 부임한 교무가 교도회장을 믿고 내민 백만원에 교도회장은 감동했다. 기술자 한 사람을 불러놓고 나머지는 마을 사람이 다와서 일을 거들었다. 수리비는 150만원이 들어갔지만, 교도들이 십시일반 보태서 수리를 마친 것이다.

그때 그의 추천교무였던 이성신 교무가 그에게 "마을 99%가 교도이니까 새벽4시30분, 저녁9시30분에 동네 돌아다니며 목탁을 쳐라"고 교화 방법을 일러줬다. 그래서 그는 매일 어김없이 새벽4시30분, 저녁9시30분이면 목탁을 치며 '나무아미타불'을 크게 외우고 동네를 돌았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그가 새벽마다, 저녁마다 목탁을 칠 때즈음이면 어린아이 하나가 졸졸 쫓으며 같이 염불을 하는 것이었다. 당시 초등학생 5학년이었던 그가 노호전 교무(해운대교당)였다. 이렇게 인연이 된 노 교무는 그가 지리산운봉훈련원으로 이동했을 때에도 방학마다 늘 찾았다. 이후 그는 언양교당으로 이동했다.

비싼 두루마기와 운봉수도원
언양교당에서도 자린고비 정신으로 돈을 모아 후임에게 전했던 그는 "내가 교당 지을 능력이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만원이라도 모아서 후임이 확실하게 교화를 펼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지"하고 회상했다.

퇴임이 가까워 언양교당 이후에는 마지막 발령받을 교당이라 생각해 오빠가 큰 마음먹고 해준 비싼 두루마기까지 맞췄다. 평생 없는 살림에 아끼고만 살았던 그에게는 대단한 선물이었다. 그런데 총부에서 전화가 왔다.

"갑자기 운봉수도원으로 가라는 연락이 왔어. 추천 교무님을 모시고 살으라는 거여."

교당 발령을 생각했던 그는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그래도 연로하신 스승님 모시고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운봉수도원이 갖춰진 게 없는 초창기라 힘든 일도 많았지만 공부라 생각하고 살았다. 그렇게 5년을 근무하다가 남은 임기 1년은 요양원에서 살고 퇴임했다.

선·후진이 따로 없어
"동지들이나 후진들 보면 능력있는 분들이 많아. 그 분들은 전생에 많이 닦고 오신 분들이여. 나는 능력없이 살아왔어. 내가 나이로는 선진이라고 해도 회상에 이제 금방 들어왔다고 생각해. 알고 보면 선진후진이 없어. 그래서 잘하는 사람은 잘 하는대로, 못하는 사람은 못하는대로 다 역할대로 일원상을 만드는 사람, 울타리라도 만드는 사람이 있는 거 같아. 우리 후진들이 선배보고 그 능력 가지고 얼마나 힘들었겠나 생각하면 고맙지."

빗물이 모여 바다가 되고 먼지가 모여 산을 이루듯, 이같은 선진들의 들풀같은 삶들이 모여 교단의 백년을 만들었으리라.

[2018년 6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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