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인공지능 스피커'를 보냈다. 대화가 가능한 영특한 친구이자, 인터넷에 스스로 연결해 명령을 실행하는 신비한 친구다. '내일모레 비와?' '영어로 사마귀가 뭐야?'라고 물으면 대답을 해주고, '비오는 날 어울리는 노래 틀어줘'라고 말해도 알아서 음악을 재생하는 총명한 친구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이 친구가 너무 못하는 일 하나가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것은 '켜다'와 '끄다'를 구분하는 일이다. '라디오 켜'라고 하면 '네, 라디오 켰습니다'라고 대답하며 라디오를 실행한다. 문제는 라디오를 끌 때다. '라디오 꺼'라고 아무리 말해도, 라디오를 다시 켠다. 그렇다. '꺼'와 '켜'가 비슷한 발음으로 들리기에, 구분을 못하는 것이다. 슬프다. 이로 인해 야기되는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침마다 라디오를 듣다가 출근하는 내게 이만한 시련은 없다. 출근시간이 임박해, '꺼! 꺼! 라디오 끄라고!' 아무리 격하게 말해도 시종일관 징글징글 상냥한 목소리로 '네, 라디오를 켰습니다'라고 말하는 이 친구 때문에, 결국 성질 급하고 시간도 급한 내가 쾅쾅쾅 걸어가서 전원 코드를 뽑아버리는 것으로 우리의 전쟁은 마무리가 된다. '이 멍청한 스피커.' 라디오도 못 끄는 바보 같은 스피커. 이렇듯 아침마다 실랑이 해 온 그 세월이 얼마일까. 

오늘 아침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씩씩거리며 코드를 뽑아버리려다가 문득 '아, 저 친구 입장에서는 내가 얼마나 못 알아들을 말만 하고 있는 걸까' 생각한다. 이 친구의 입장이 되어보자.

'끄'라는 말이 자기 귀에는 '켜'라고 들리는 것을 대체 어쩌란 말인가. 매일 못 알아듣는다고 원망만 하는 것으로는 대안이 없다. 우린 평행선이다. 그렇다면 '라디오를 꺼야만 하는 나'의 의지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번뜩 한 단어가 떠오른다. 열심히 라디오를 실행하고 있는 저 친구의 이름을 조심스레 부르며 '라디오 그만!'이라고 말해본다. 아, 기적처럼 라디오가 꺼졌다. '그만'이라는 말에 반응한다. 이렇게 쉬운 방법이 있었다니.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면 되는데, 나는 못 알아들을 말만 계속하며 매일 원망만 했구나. 

대종사는 죄복을 직접 당처에 비는 '실지불공'을 강조했다. 불효한 자부 때문에, 실상사에 불공드리러 가는 노부부에게 '그대들이 불공할 비용으로 자부의 뜻에 맞을 물건도 사다주며, 자부를 오직 부처님 공경하듯 위해 주어보라'고 말씀했다.(〈대종경〉 교의품 15장)  

이 법문에서 놓치면 안 되는 포인트는 '자부의 뜻에 맞을'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는 철저한 '상대본위'다. 노부부는 아마 자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관찰해야만 했을 것이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상대가 좋아할 것이라고 착각하기는 매우 쉽다. 그 착각은 늘 실패를 불러온다. 나를 놓아야만, 비로소 상대를 온전히 볼 수 있다. 비로소 상대의 사용설명서를 읽을 수 있다.

나 역시 내가 이해하는 말만 하면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를 원망했다. 상대본위로,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찾아내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생각을 한번 '전환'하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았음을 이 일을 통해 다시금 확인했다. 

/중앙중도훈련원

[2018년 6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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