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김천륜 도무] 아버지가 딸을 보겠다며 찾아왔을 때, 나는 삼정원에 근무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전라도 종교라 강조하며 그렇게 반대하던 분이 늦게라도 나를 찾아와 준 점이 너무 감사했고, 살아생전에 원불교 성지를 순례했기에 감사했다. 열반하고서는 교당에서 49재를 모셨다.

어머니도 내가 집으로 찾아뵐 때는 함께 교당에 나가고 했지만, 교통편이 너무 불편해서 혼자는 잘 못 나갔다. 지금은 요양병원에서 지내고 있어 자주 찾아뵙지는 못해도 틈틈이 전화를 해, 딸 걱정 안하도록 불공을 하고 있다.

삼정원에 있을 때 참 재미있게 살았다. 그때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이니까 공부심도 대단하고 활동력도 있었다. 법당관리하면서 사경에 푹 빠졌다. 또 <정전>을 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안되지만 열심히 외웠던 것 같다. 또 삼정원 근무할 때 24시간 오픈된 병동이 생겼는데, 이 병동을 맡으면서 저녁마다 환자들이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하러 다니며 성가도 열심히 재미나게 부르곤 했다.

당시 함께 근무하던 직원들도 교당에 열심히 다닌 교도들이었는데 뜻이 잘 맞았다. 동생들인데 거의 내 방에 와서 살다시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방도 작았는데 전혀 불편하지 않게 재밌게 살았던 것 같다. 지금은 모두 정토가 됐다.

그렇게 활발하고 재미있게 살다보니 생활인들도 나를 많이 따랐다. 입구 큰 길가에서 달리기도 하고, 미륵산도 데리고 다니고, 삼정원 뒤쪽에 있는 진달래꽃을 보러 가기도 했다. 물론 직원들도 등산을 좋아해 인터넷으로 등산신발을 서로 사면서 안 다니려는 다른 직원을 설득하기도 했다. 그렇게 삼정원에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생활인들에게도 최선을 다해 살았던 기억이 깊이 남아있다.

삼정원에서 예비덕무 기간 4년과 예비과정 4년을 보내고 원기88년 출가했다.  이후 영산식품에 발령이 나서 10개월 정도 살다가, 영산선학대학교 후원기관인 원광대학교산본병원 장례식장으로 다시 발령받았다. 여기 있을 때에 공부가 깊어진 것 같다.

당시 동안양교당에 있던 김관진 교무가 토요일마다 정전마음공부방을 열었다. 같은 교화단원으로서, 공부심 챙겨 참여했는데 정전마음공부방을 통해 깊은 공부가 시작된 것 같았다. 평소 기도와 법회는 자력으로 수행하고 있었지만 정전공부는 체계적으로 하지 못했었다. 

공부방을 통해 깊어진 것은 교법에 대한 신심이었다. 나는 평소에 화두가 잘 안 걸려서 '근본적으로 안 걸리는 사람인가' 했는데, 공부를 시작하면서 화두가 걸리기 시작했다.

예를 들자면 '공부위주 교화종, 교화위주 사업종'이 그것이다. 여기 장례식장은 영산선학대학교 후원기관으로 돈을 많이 벌어서 보내줘야 학교가 운영될 텐데 왜 사업종이라 하셨을까 의문이 들었다. 또 우리는 오만년대운이라 했는데 일반사회인들이 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일까, 피식하고 웃지나 않을까, 하는 의문들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그러한 의심이 생기다가 '오만년대운'에서 해오하는 일이 생겼다.

장례식장에는 모든 종교인이 다 온다. 어느 날 가난한 영가가 왔다. 그 영가는 가난해서 형제들이 장례에 돈을 적게 쓰려고 시신을 기증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원광대학교병원에 연락을 했다. 연락을 마치자 나는 문득 그 영가가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영가 가족은 모두 기독교인들이었다. 나는 법당교무에게 원광대학교 병원에 시신을 기증한 영가이니까 독경을 해주면 좋겠다고 말하고 가족들에게도 권하니 다들 좋다고 했다.

법당교무가 독경을 시작하려고 하니 그 가족들이 다른 친지들도 부르겠다고 했다. 그런데 다른 친지들은 또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같은 가족들이지만 사실 여러 종교가 한자리에 모여 한 영가를 위해 독경과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보고 그 '오만년대운'에 대한 의심이 확 풀렸다.

아! 오만년대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로구나. 원불교는 어떤 종교라도 수용하고 포섭할 수 있고, 영가를 위해서도 모든 종교가 한자리에 모여 '좋은 곳으로 가라고 기도해 주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것이 오만년대운이 아니고 뭘까' 하면서 의심이 풀린 것이다.

/중앙여자원로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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